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최근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 시장 진출과 획일적 기금형 제도 도입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거대 공공기관이 시장을 장악하는 것보다는 민간의 자율성과 경쟁을 통한 해법이 더 바람직하다.
첫 번째 대안은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에 한정해 선택적으로 기금형을 도입하는 것이다. DB형은 기업이 운용 책임을 지는 구조이므로 자산 통합 운용인 기금형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현재 대부분 기업들이 안전만 추구하다 보니 수익률이 바닥권이다. 자산 규모가 크고 운용 역량을 갖춘 대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연합해 'DB형 기금'을 만들도록 허용하자. 규모의 경제를 통해 인프라, 사모펀드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할 수 있게 되면 수익률 향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적 도입'이라는 점이다. 기존 계약형을 유지할지, 기금형으로 전환할지는 기업이 결정한다. 확정기여형(DC)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의 선택권도 그대로 보장된다.
두 번째는 중소기업 근로자를 위한 공적기관 설립이다. 30인 미만 영세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여전히 저조하다. 중소기업 사장들에게는 관리 부담이 크고, 금융기관들은 수익성이 낮아 소극적이다.
영국의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를 벤치마킹해보자. 100인 미만 중소기업 근로자를 대상으로 퇴직연금 가입과 관리를 지원하고, 저비용의 표준화된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는 '퇴직연금관리공단'을 만드는 것이다.
영국 NEST는 설립 후 퇴직연금 가입률을 크게 높였고, 노인 빈곤율을 30%에서 15% 수준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다. 수익률도 최근 10년간 연평균 9.9%를 기록해 우리의 1~2%를 압도한다. 핵심은 시장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각지대만 보완하는 역할에 국한하는 것이다.
현재는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해야 하니 금융사들이 판매 수수료에만 신경 쓴다. 운용 성과에 대한 책임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임형이 도입되면 금융사들이 오직 수익률로만 평가받게 된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수한 운용 인력 확보와 리서치 역량 강화에 적극 나설 것이다.
미국의 '매니지드 어카운트'나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이 이런 모델이다. 호주는 최근 10년간 연평균 8% 이상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퇴직연금이 전문가에 의해 적극 운용되면서 자본시장 발전과 금융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노후를 책임지는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하지만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단기적 정치 논리나 특정 기관의 이해관계가 아닌, 가입자인 근로자의 이익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거대 공공기관의 시장 지배보다는 민간의 창의성과 건전한 경쟁이 답이다. 430조원이 진짜 일하는 돈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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