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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6주기] 삼성 선대회장이 남긴 기술·인재·문화 유산

산업 강국과 문화 강국 기반을 닦다

2026-10-23 15:00:00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사진=삼성전자]이미지 확대보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사진=삼성전자]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반세기 전 반도체를 미래 산업으로 택한 결단이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그가 기술과 인재, 문화에 걸었던 투자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자원 없는 나라의 선택, 반도체에 개인 재산을 걸다
이 선대회장은 1974년 자금난에 빠진 한국반도체에 개인 재산을 투자하며 반도체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은 핵심 부품을 해외 기술에 기대고 있었고, 1차 오일쇼크로 세계 반도체 기업들은 구조조정에 나서던 때였다. 삼성 내부에서도 사업 성공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은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 선언을 계기로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같은 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선진 업체와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삼성전자 '화성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이미지 확대보기
삼성전자 '화성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불황에 투자한 선택이 초격차를 만들다
삼성의 성장에는 불황기에도 투자를 멈추지 않은 선택이 있었다. 1984년 경쟁사들이 4인치 웨이퍼 생산라인을 늘릴 때 삼성은 6인치 웨이퍼로 전환했다. 1987년 일본 업체들이 반도체 불황으로 투자를 줄일 때는 오히려 신규 생산라인을 건설했다. 1990년대에는 8인치 웨이퍼 양산 체제를 선제적으로 구축했고, 닷컴버블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차세대 기술에 대한 투자를 이어 갔다.

그 결과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했고, 1993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지 약 20년 만에 미국과 일본 기업이 주도하던 시장에서 정상에 선 것이다. 기술과 원가, 생산능력에서 후발 업체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전략의 출발점이었다.

삼성전자 측 자료에 따르면 2026년 2분기 기준 삼성전자는 글로벌 D램 시장에서 39.4%, 낸드 시장에서 29.3%의 점유율로 각각 1위를 기록했다.

2004년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해 생산라인을 점검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2004년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해 생산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30년 전 내다본 컴퓨터·소프트웨어·로봇의 미래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뿐 아니라 컴퓨터, 소프트웨어, 로봇 등 첨단기술이 산업 판도를 바꿀 것으로 내다봤다. 1987년 회장 취임 당시부터 컴퓨터 활용의 대변혁을 예견했고, 전자·정보기술이 기존 제조업과 결합하면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동차 같은 전통 제조업도 전자기술과 결합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봇을 단순한 생산자동화 설비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산업 구조를 바꿀 기술로 바라본 점도 주목된다. 1990년대에 그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에게 남는 핵심 역할은 창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전망은 생성형 AI와 AI 데이터센터,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AI가 발전할수록 고성능 메모리와 저장장치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인재를 먼저 키운 경영, 지역전문가 제도
이 선대회장은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재를 꼽았다. 자본과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인재론을 바탕으로 국적과 출신을 가리지 않는 인재 확보를 중시했다.

인재를 영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간 육성하는 체계도 마련했다. 1990년 도입한 지역전문가 제도가 대표적이다. 직원들은 해외에서 장기간 생활하며 현지 언어와 문화, 시장을 익혔고, 회사는 급여와 교육비, 체류비 등을 지원했다. 제도 도입 당시 비서실이 20여 명의 선발안을 보고하자, 이 선대회장은 규모를 확대하도록 지시해 200여 명을 해외로 파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회사를 떠나더라도 육성한 인재가 결국 국가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교육 투자를 기업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로 바라봤다.

1993년 신경영 선언, 양에서 질로의 전환
이 선대회장은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더라도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양적 성장에 치중하던 경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발언으로 상징되는 신경영은 제품 품질뿐 아니라 사람, 조직, 제도, 기업문화까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혁신하자는 것이었다.

원칙은 근무제도와 생산현장에도 적용됐다. 1993년 7월부터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도입했다. 업무 집중도를 높이고 퇴근 후 어학과 자기계발에 시간을 쓰게 해 역량을 키우려는 취지였다. 생산현장에는 불량이 나면 원인을 해결할 때까지 라인을 멈추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 실시한 불량제품 화형식은 품질경영 의지를 보여 준 대표적 장면이다. 품질 기준에 미달한 휴대전화 등 약 500억원 규모의 제품을 폐기하며, 불량 제품은 시장에 내놓지 않겠다는 원칙을 조직 전체에 각인시켰다.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왼쪽 두번째)과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왼쪽)이 지난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한 리움미술관에서 개관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개관식에는 리움을 건축한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우스, 국립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 등 문화계, 학계, 언론계 인사 250여명이 참석했다. 삼성전자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왼쪽 두번째)과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왼쪽)이 지난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한 리움미술관에서 개관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개관식에는 리움을 건축한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우스, 국립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 등 문화계, 학계, 언론계 인사 250여명이 참석했다. 삼성전자 제공

2만 3000여 점의 기증, 국민의 문화자산으로
이 선대회장은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을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으로 여겼다. 유족들은 이러한 뜻을 이어 2021년 4월 그가 평생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 2만 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 전통미술의 대표작을 비롯해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의 근현대미술과 모네, 피카소 등 해외 거장의 작품도 포함됐다. 개인의 수집품이 누구나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는 국가 문화자산이 된 것이다.

서울에서 시작된 기증품 전시는 광주, 대구, 청주, 제주와 경남, 부산, 울산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KH 컬렉션' 국내 순회전의 누적 관람객은 350만 명을 넘어, 단일 컬렉션 전시로는 국내 역대 최고 기록이라고 기관 측은 집계했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2006년 밴플리트상 시상식에서 이재용 회장의 축하를 받으며 상을 받고 있다.(가운데) 1972년 장충동 자택에서 이병철 창업회장이 이 선대회장, 이 회장 등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왼쪽). 1993년 이 선대회장이 삼성의료원 건설 현장을 찾은 모습. 삼성전자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이건희 선대회장이 2006년 밴플리트상 시상식에서 이재용 회장의 축하를 받으며 상을 받고 있다.(가운데) 1972년 장충동 자택에서 이병철 창업회장이 이 선대회장, 이 회장 등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왼쪽). 1993년 이 선대회장이 삼성의료원 건설 현장을 찾은 모습. 삼성전자 제공

워싱턴에서 런던까지,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 미술
KH 컬렉션은 국내를 넘어 한국 미술의 역사와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2025년 11월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시작된 국외 순회전은 2026년 3월 시카고미술관을 거쳐 10월 1일부터 영국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영국박물관이 대규모 한국 미술 특별전을 연 것은 1984년 이후 42년 만이다.

전시에서는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서화, 근현대미술 등을 통해 2000년에 걸친 한국 예술의 창의성과 발전 과정을 소개한다. 해외 주요 박물관에서 한국 미술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가 이어지면서, 세계 관람객이 한국 문화유산의 깊이를 접할 기회도 넓어지고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안내견으로 훈련받고 있는 리트리버를 쓰다듬고 있다. 삼성화재이미지 확대보기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안내견으로 훈련받고 있는 리트리버를 쓰다듬고 있다. 삼성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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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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