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반도체 기업들이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새로운 기업 DNA'로 재정의하고 있다.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조직 전체를 근본부터 바꾸는 대전환이 시작됐다.
이미지 확대보기삼성전자: "조직 DNA 완전히 바꾸겠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선언은 명확했다. 올해 신년사에서 그는 "일하는 방식과 조직의 DNA를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바로 전 관계사를 대상으로 ChatGPT, Gemini, Claude 등 글로벌 생성형 AI 플랫폼 3종의 공식 도입을 결정했다. 특정 AI에 의존하지 않는 멀티 플랫폼 전략으로, 임직원들이 업무 특성과 목적에 맞춰 가장 적합한 AI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삼성은 먼저 2,500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실효성 검증을 진행했다. 현장 테스트를 거쳐 글로벌 빅테크의 대표 서비스 3종을 최종 선정하고 도입을 준비해 왔다.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은 "외부 생성형 AI 도입은 단순히 업무 도구로서 AI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실행 속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전사적 확산 속도가 핵심이다. 삼성은 2026년 8월까지 사장단과 임원 2,300명을 대상으로 2박 3일의 고강도 AX(AI 대전환) 부트캠프를 실시하고 있다. 개발, 구매, 제조, 물류, 마케팅, 판매, 서비스, 경영지원 등 기업 운영의 핵심인 8대 프로세스 전 영역에 AI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려는 전략이다.
삼성은 과거 디지털 전환과 모바일 전환 때처럼 이번 AI 대전환도 제품과 서비스를 넘어 조직 문화 전체를 'AI 네이티브'로 탈바꿈하려고 한다. 제조 현장에서는 디지털 트윈 기술과 AI를 결합해 제품 검증 기간을 대폭 단축하고 검증 오류를 크게 줄이고 있다. TV와 세탁기 개발 과정에서 이미 구체적인 성과를 냈다. 2030년까지 AI 자율공장으로의 전환 추진도 발표했다.
이미지 확대보기SK하이닉스: 반도체 판도 바꾸는 103조원 베팅
메모리 공급 부족이 곧 AI 산업의 병목이다. 현재 글로벌 메모리 공급 부족 폭이 40%에 달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빅테크 클라우드 자본 지출이 올해 7,250억 달러를 초과하면서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103조원 투자는 이 부족분을 메울 전략적 베팅이다. 회사는 세 개의 주요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먼저 청주 M15X 공장 가동으로 HBM 생산을 가속화하며 2026년 초 양산에 돌입한다. 용인 클러스터 Y2 파운드리 공장은 2027년 7월 착공해 2029년 6월 첫 클린룸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HBM과 차세대 DRAM을 생산할 예정이다. 청주 M17 공장은 낸드 플래시 메모리 생산 중심으로 2028년 12월 첫 클린룸 가동을 예상한다.
이미지 확대보기LG전자: R&D 속도 혁명을 일으키다
LG전자는 AI의 실용성에 집중한다. 자체 개발한 초거대 AI 'EXAONE'과 데이터 분석 시스템 '찾다(CHATDA)'를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찾다'의 위력은 수치로 명확하다. 연구개발 과정에서 데이터를 탐색하는 시간이 기존 3~5일에서 30분 수준으로 대폭 단축됐다. 단순히 시간을 줄이는 것을 넘어 의사결정의 속도와 정확성을 동시에 높인다. 정형 데이터를 넘어 복잡한 기술 보고서, 특허 문서, 연구 자료 등 비정형 데이터 분석까지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이 곧 제품 전략이 된다. LG전자 직원들은 '찾다'와 대화하며 특정 지역이나 문화권에 최적화된 제품 전략을 수립한다. 인도에서는 고객들의 냉장고 사용 패턴 분석을 바탕으로 무더운 날씨에 대응하는 위생·신선 기능을 추가한 모델을 출시했다. 브라질에서는 세탁량이 적고 사용 빈도가 높은 고객 특성을 반영해 소량급속 코스를 앞세운 UX 세탁기를 선보였다.
2018년 첫 선보인 사내 AI 에이전트 'LGenie AI'는 단순 챗봇에서 업무용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EXAONE을 기본으로 Microsoft Azure AI, OpenAI GPT, Google Gemini 등 다양한 생성형 AI를 하이브리드로 접목했다. LGenie는 월 70만 건 이상의 업무 상호작용을 처리하고 있으며, 업무 지식 검색, 문서 요약, 번역, 코드 분석, 아이디어 생성 등 실무 중심의 고도화된 기능을 지원한다.
단순한 기술 도입에서 기업 DNA 전환으로
세 기업의 AI 전략은 방향은 같지만 강조점이 다르다. 삼성전자는 조직 전체의 의식 전환과 일하는 방식의 근본 변화에 집중한다.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메모리 병목을 해결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한다. LG전자는 자체 기술을 통해 단계적으로 AI를 내재화한다.
공통점은 명확하다. 세 기업 모두 AI를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바라본다. 팀스파르타가 올해 발표한 '2026 기업 AX 벤치마크 리포트'에 따르면 전자·반도체 산업의 AI 성숙도는 68점으로 금융(70점)에 이어 두 번째다. 하지만 업체별 편차는 크다. 일부 기업은 이미 높은 성숙도를 보이는 반면, 나머지는 여전히 도입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AI 네이티브 기업으로의 탈바꿈은 투자 규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빠르게 조직 전체가 이를 내재화하고 실행에 옮기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삼성전자의 전 임직원 교육, SK하이닉스의 103조원 투자, LG전자의 R&D 시스템 개편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AI는 이제 선택지가 아니다. 조직의 근본을 바꾸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도전 과제도 있다. AI 도입 과정에서 데이터 보안, 윤리적 의사결정, 임직원 저항 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성공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 선언이 한국 전자·반도체 산업을 '도구의 시대'에서 'DNA의 시대'로 옮겨놓는 신호탄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거대한 변화 앞에 서는 서막이 될지는 2027년 실적이 말해줄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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