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조선소 방문이 만든 변곡점
협상 타결의 결정적 계기는 존 펠란 미 해군성 장관과 러셀 보트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이 한미 관세협상을 앞두고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한화 필리조선소에 방문한 것에서 시작됐다. 특히 보트 국장은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에도 예산관리국장을 지낸 핵심 측근으로, 조선업 재건을 목표로 한 '마스가(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MASGA)' 프로젝트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7월 30일 현지시간 오후, 펠란 장관과 보트 국장은 김동관 부회장, 김 필리조선소 대표 안내로 주요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한미 조선업 협력 확대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김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역량을 갖춘 한화가 필리조선소를 교두보 삼아 미국 내 신규 조선소 건설, 조선 인력 양성, 공급망 재편, 선박 MRO(정비·보수) 등을 주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필리조선소를 방문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마스가 프로젝트'를 포함한 관세협상 타결을 발표했다. 미 정부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러셀 보트 국장과 존 펠란 장관의 필리조선소 현장 방문 결과를 보고 받고 관세협상 타결을 최종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동관 부회장의 발 빠른 외교
관세협상 막판 국면에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의 역할도 컸다. 김 부회장은 지난 28일 정부의 대미 관세 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출국했다. 그는 협상 시한인 다음달 1일까지 미국 현지에 머물며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의 통상 협의에 힘을 보탤 예정이었다.
한화그룹은 협상 지원을 위해 구체적인 투자안을 제시했다. 한화그룹은 올 초 1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필리조선소(한화필리십야드)를 인수했다. 관세 협상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한화필리십야드에 대한 추가 투자, 현지 기술 이전, 인력 양성을 정부에 제안했다고 한다.
1500억 달러 규모 MASGA 프로젝트의 핵심축
이번 관세협상에서 핵심 카드로 작용한 것은 바로 MASGA 프로젝트였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을 가진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국 민간 조선사들의 대규모 미국 현지 투자와 이를 뒷받침할 대출·보증 등 금융 지원을 포괄하는 패키지로 구성됐다.
한화의 전략적 포지셔닝
한화는 이미 미국 조선업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8월 미 해군 제7함대 소속 군수지원함 윌리 쉬라함(USNS Wally Schirra)의 MRO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유콘함(USNS Yukon), 찰스 드류함(USNS Charles Drew) 정비 계약까지 성사시켰다.
더 나아가 한화는 미국 소형 군함 및 군수지원함 시장의 40~60%를 점유하고 있는 호주 방산 조선 기업 '오스탈(Austal)'의 경영권 확보도 추진 중이다. 현재 한화는 이미 오스탈 지분 9.9%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속 확대해 경영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필리조선소의 미래 계획
한화그룹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필리 조선소(Philly Shipyard) 인수를 위한 제반절차를 최종 완료했다고 지난해 12월 밝혔다. 한화그룹은 2024년 1억 달러(한화 약 1390억 원)를 투자해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는데 인수에는 한화시스템(60%)과 한화오션(40%)이 참여했다.
한화는 이 조선소를 통해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식 생산관리 기법을 도입해 현재 연 1~1.5척 수준인 건조 능력을 2035년까지 10척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이는 현재 대비 약 7배 규모의 생산능력 증대를 의미한다.
미국 해군성의 이례적 행보
펠란 장관의 한화 조선소 방문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앞서 펠란 장관은 지난 4월 거제조선소를 찾아 김 부회장의 안내로 상선과 잠수함 건조현장, 미 해군 7함대 유콘함 MRO 현장을 살펴본 바 있다. 미 해군 최고위 인사가 한화가 보유한 한국과 미국의 조선소를 모두 방문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펠란 장관은 "조선해양 산업 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트럼프 정부와 미 해군성의 최우선 순위다. 3개월 전 한국의 한화(오션) 조선소를 방문해 그곳에서 현대화돼 있는 현장을 확인했다"며 "이곳 필리조선소에서 어떤 투자가 이뤄지고 조선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지 직접 보는 것이 중요했다"고 밝혔다.
타결 결과와 의미
최종 타결된 협상 결과를 보면, 미국이 우리나라에 8월 1일부터 부과하기로 예고했던 상호 관세 25%는 15%으로 낮아진다. 이는 앞서 타결한 일본·유럽연합(EU)과 같은 세율로, 한국이 경쟁국 대비 불리한 위치에 서지 않게 됐다는 의미다.
한국은 미국에 총 4500억달러(약 625조원) 규모의 투자 및 에너지 구매를 약속했으며, 이 중 조선업 분야 협력을 위한 전용 펀드가 1천 5백억 달러 조성되는데요. 선박 건조와 유지·보수·정비·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해 투자될 전망이다.
MASGA, 맞춤형 외교 카드로 평가
MASGA는 단순한 수출 확대가 아닌, 한미 간 전략산업 협력과 중국 해양 패권 견제를 함께 겨냥한 맞춤형 외교 카드로 평가된다. 한화는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 조선-방산 융합 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숙원, '글로벌 방산기업 톱10' 진입이 미국 필리조선소에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한화는 2022년 세계 방산기업 순위 42위에서, 2023년에는 24위(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기준)로 수직 상승했다.
이번 한미 관세협상 타결은 단순한 무역 협상을 넘어, 한화그룹이 글로벌 방산·조선 기업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자, 한미 양국이 중국에 맞서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한화 필리조선소는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 거점이자 실질적 플랫폼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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