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시간이 삶의 대부분을 채운다
경주마는 달리고, 도착하고, 순위와 주파시간으로 남겨진다. 하지만 말의 일생은 그런 기록의 바깥에서 더 길게 흘러간다. 태어나 어미 곁에 머물고, 젖을 먹고, 풀을 뜯고, 천천히 걷다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간들은 어떤 결과로도 남지 않지만, 한 생명의 시간을 실제로 채우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말의 시간에서 발견한 사람의 삶
작가는 말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사람의 삶을 발견한다.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은 특별한 순간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평범한 하루와 그 안의 소소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전시 제목 '읽히지 않은 시간’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아직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시간이라는 작가의 시선을 담고 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제목 안에 조용히 담겨 있다.
흔적이 느껴지는 붓 터치와 현실과 꿈의 경계
작품은 세밀한 묘사보다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중첩된 붓 터치와 색의 융합으로 완성됐다. 그 결과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장면이 펼쳐진다.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풍경에 가까워, 관람객이 각자의 일상을 겹쳐 볼 여지를 남긴다.
대표작 《시간의 시작》이 말하는 평범한 신화
대표작 《시간의 시작》은 평범한 시간이 신화처럼 기억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 준다. 유럽의 작고 오래된 성당에 들어서면 마주칠 것 같은 친근한 분위기를 지녔다. 나팔을 부는 천사와 구름 사이로 환하게 등장하는 백마의 모습은, 말이든 사람이든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신화가 시작된다는 믿음을 시각적으로 옮긴 장면이다.
일상이 쌓여 완성되는 자신만의 신화
작가는 가끔은 무료하고 때로는 고단하지만, 켜켜이 쌓인 일상이 모여 자신만의 신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는 그 메시지를 조용히 전하는 자리다. 전시는 과천 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11월 29일까지 열린다. 화려한 결과가 아닌 평범한 하루에 눈을 돌릴 때, 우리의 시간도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할지 모른다.
[글로벌에픽 이성수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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