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에서 곡선으로…경쟁의 축이 변하다
곽 대표는 "관점을 밖에서 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SK하이닉스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고객과 파트너의 시선에서 다시 보고, AI 생태계의 변화 속에서 아직 보지 못한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역량만으로는 부족하며, 외부 환경의 변화 속도와 방향을 파악하고 이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이 곧 경쟁력이라는 진단이다.
이는 단순한 전략 수정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사고방식을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메모리 시장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AI라는 변수에 따라 계속 모양을 바꾼다면, 그에 맞춰 생산 시스템도 메모리 설계도 미리 유연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다.
AI가 엔지니어를 돕는 구조…'팹' 현장이 변한다
SK하이닉스가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한 변화는 생산 현장에서의 AI 도입이다. 회사는 AI가 반도체 생산라인의 이상 징후를 자동으로 분석하고 원인과 대응 방안을 제시하는 체계를 구축 중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AI가 최종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엔지니어가 AI의 분석과 제안을 검증하고 최종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AI는 '협업 대상이자 또 다른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SK하이닉스는 표준업무절차(SOP)까지 재설계하고 있다. 사람과 AI가 함께 일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업무 흐름을 다시 짜는 것이다. 공정과 설비 데이터도 AI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다. 데이터의 의미와 상관관계를 정의해 AI가 생산 현장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만드는 것이다.
이 체계가 자리 잡으면 문제 발생 시 프로세스는 이렇게 흐른다. AI가 관련 데이터를 먼저 분석한다.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제시한다. 엔지니어는 이 결과를 검증하고 최종 의사결정을 맡는다. 사람은 반복적인 분석 업무에서 벗어나 판단과 의사결정이라는 고차원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자체 AI 플랫폼 '가이아(GaiA)'를 활용해 적용 범위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팹 내 생산 운영까지 가이아로 통합 운영하도록 준비 중이다. 제조 현장에는 안전 감독 로봇을 투입했고, 고소 작업에는 비전언어모델(VLM) 기술을 탑재한 드론도 배치했다. 반도체 설계와 생산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AI를 활용하는 '소프트웨어 공장' 체계를 구축하는 중이다.
메모리의 역할이 달라진다…'풀 스택' 전략으로 대응
AI 기술이 단순 질의응답을 넘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장시간 작업하는 '에이전틱 AI'로 진화하면서, 저장하고 불러와야 할 데이터의 종류와 양도 급속히 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메모리 전략 자체를 전환했다.
기존에는 메모리 칩 하나의 성능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AI 시스템 전체의 특성에 맞는 메모리 구조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AI 작업의 특성에 따라 3D 적층 D램, HBM(High Bandwidth Memory), HBF(High Bandwidth DRAM) 등 다양한 메모리를 조합하는 '풀 스택 AI 메모리'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3D 기술, 'HBM 이후' 시대 준비한다
차세대 메모리 기술로 3D 메모리를 향하는 이유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SK하이닉스는 3D 기술을 '소자 집적'과 '이종 집적' 두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데이터 버스 폭 극대화, 초단거리 전송, D램 주변회로에 로직 파운드리 기술 활용 등을 주요 기술 방향으로 설정했다.
다만 3D 적층 D램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려면 설계 최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발열 관리, 공정 난도 등 기존과 전혀 다른 기술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3D 기술은 팹(전공정)과 패키징(후공정)의 기술 경계까지 바꾸고 있기 때문에,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아우르는 공동 최적화가 필수다.
SK하이닉스가 생산 현장의 AI 전환, 메모리 설계 방향 전환, 미래 기술 개발까지 한 번에 그려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AI 시대에서는 경쟁이 특정 기술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적응력을 겨루는 게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직선도로 시대의 'A보다 나은 B'라는 상대적 우월성은 더 이상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 곡선도로를 읽고 그에 맞춰 몸을 날리는 속도가 승자를 갈라놓는 시대가 온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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