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오늘은 이 배가 실제로 항해할 때 마주칠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풍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바로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금융기관형 기금을 만든다 할지라도 다양한 이해관계는 존재한다. 과연 우리 기금은 힘 있는 자의 부탁이나 달콤한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금융기관형 기금의 회의실에서 벌어진 가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해답을 확인해 보자.
회의실에서 벌어진 은밀한 제안
수십 개 기업의 퇴직연금을 모아 운용하는 A금융기관의 연합형 기금. 이곳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영위원회 회의가 끝난 후, 가입 기업 중 한 곳인 대형 건설사의 최 전무가 기금 담당자인 강 본부장을 조용히 부른다. 사용자 대표 위원인 그는 이렇게 말을 꺼낸다.
"강 본부장, 이번에 우리 건설사가 발행하는 PF 유동화 증권 알지? 금리가 무려 연 12%야. 요즘 같은 때 이런 고수익 상품 없네. 우리 기금 수익률도 올릴 겸, 한 300억 원만 담아주게. 내가 운영위원인데 그 정도 추천은 할 수 있잖아?"
강 본부장은 난처하다. 최 전무는 기금의 주요 고객이자, 운영위원회의 일원이다. 과거의 계약형 제도였다면 영업 담당자는 실적 압박과 고객 관리 차원에서 이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절은 곧 영업 실패로 이어졌으니까.
하지만 기금형 제도가 도입된 지금, 강 본부장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서류 한 장을 내민다.
"전무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절차상 불가능합니다. 지난달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결정한 자산배분 지침상, 부동산 관련 자산의 위험 한도가 이미 꽉 찼습니다. 또한 위험관리위원회의 사전 심사 기준에 따르면 해당 등급의 채권은 편입 대상이 아닙니다. 제가 임의로 넣고 싶어도 시스템에서 승인이 나지 않습니다."
기금형 퇴직연금, 특히 금융기관형 기금의 가장 큰 장점은 운영과 운용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 전무가 속한 기금운영위원회는 배의 목적지와 항로의 범위를 정하는 곳이다. 목표 수익률을 세우고, 감내할 수 있는 위험 한도를 설정한다. 하지만 실제 배의 키를 잡고 파도를 넘는 구체적인 투자 결정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와 전문운용사가 독자적으로 수행한다.
즉 운영위원이 이 종목을 사라고 지시해도, 전문가 그룹인 운용위원회에서 자산 배분 원칙에 어긋나며 위험 대비 수익성이 낮다고 전문적인 판단을 내리면 그만이다. 이 이중 잠금장치가 부당한 압력을 거르는 첫 번째 필터다.
성과평가위원회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기금의 운용 내역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지난 분기 수익률이 문제가 아니다. 왜 허용된 위험 한도를 초과하는 자산을 편입했는가. 이 투자는 원칙을 위반했다. 성과평가위원회에서 이런 지적을 받게 되면, 해당 운용역은 문책을 받거나 심지어 운용사 교체의 사유가 된다. 즉 강 본부장 입장에선 최 전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직업적 생명을 거는 일이 되는 셈이다.
더불어 위험관리위원회는 실시간으로 레이더를 켜고 있다. 특정 기업이나 특정 자산에 투자가 쏠리는 순간, 시스템 경고등이 켜지며 투자 불가 판정을 내린다. 사람의 정이 개입할 틈을 시스템이 차단하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감시가 사후적이 아니라 사전적이라는 점이다. 문제가 터진 후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시스템이 먼저 막는다. 위험관리위원회는 투자 집행 전에 심사하고, 성과평가위원회는 정기적으로 점검한다. 이 이중, 삼중의 안전망이 있기에 개인의 일탈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법으로 강제된 거절의 의무
이 모든 시스템의 근간에는 수탁자 책임이라는 법적 맹세가 있다. 금융기관형 기금의 운용 주체는 충실의무를 진다. 이는 이해관계자의 부탁이 아니라, 오직 가입자인 근로자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다.
과거에는 고객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었다가 변명이 되었지만, 기금형 제도 하에서는 그것이 바로 법 위반, 즉 배임이 된다. 강 본부장은 최 전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명분을 법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수탁자 책임은 단순한 윤리 강령이 아니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수탁자 책임 위반 시 민사상 손해배상은 물론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일부 연금 운용사들이 가입자 이익보다 자신들의 수수료 수익을 우선시했다가 거액의 벌금과 운용 자격 박탈을 당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도 기금형 제도 도입과 함께 수탁자 책임을 법제화해야 한다. 단순히 권고 사항이 아니라, 위반 시 명확한 처벌 규정이 있어야 제도가 작동한다. 양심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법과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거절의 용기가 생긴다.
신뢰는 사람이 아닌 시스템에서 나온다
우리가 도입하려는 금융기관형 기금은 단순히 수익률 높은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청탁이나 회사의 이익보다, 근로자의 노후 자산이 가장 우선시되는 거절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운영위원회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운용위원회에서 전문가들이 깐깐하게 심사하며, 성과평가위원회가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는 구조. 이 촘촘한 그물망이 있기에 근로자들은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의 노후를 맡길 수 있다.
과거 우리는 사람을 믿었다. 좋은 사람이 맡으면 잘 운영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환상임을 보여줬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압력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고, 유혹 앞에서는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스템을 만든다. 사람이 잘못하고 싶어도 잘못할 수 없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연 12%의 유혹은 달콤하다. 목표 수익률이 5%인 시대에 12%라는 숫자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위험을 보지 못하면, 500조 원의 노후 자금은 순식간에 증발할 수 있다. 강 본부장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부의 시스템은 완성되었다. 운영과 운용의 분리, 위원회의 견제와 균형, 수탁자 책임의 법제화. 이 세 가지 기둥이 금융기관형 기금의 신뢰를 떠받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고인 물이 되지 않으려면, 배 밖에서도 누군가 끊임없이 지켜봐야 한다. 기금끼리 서로 경쟁하고, 시장이 감시하는 환경이 필요하다. 아무리 내부 통제가 완벽해도, 외부의 눈이 없으면 시스템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거대한 연금 운반선들이 서로 누가 더 안전하고 투명하게 운항하는지 경쟁하게 만드는 공시와 외부 감독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며, 퇴직연금 개혁의 마지막 퍼즐을 맞춰보겠다. 시장의 눈이 어떻게 감시자가 되는지, 투명성이 어떻게 경쟁력이 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거절의 품격은 개인의 용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스템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지키는 것은 끊임없는 감시와 투명한 공개다. 500조 원의 노후를 지키는 이 여정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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