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하지만, 금융권에서는 근로자의 노후 자산이 증시 방어용 '총알'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이번 논쟁의 중심에는 수천만 근로자의 노후 자금이 놓여 있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달리 운용 성과가 고스란히 개인 통장으로 귀착되는 '100% 사적 자산'이다. 수익률이 오르면 은퇴 자금이 늘고, 손실이 나면 퇴직금이 깎이는 구조인 만큼 근로자들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걸려 있다는 점에서, 이번 논의가 단순한 금융시장 재편을 넘어선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민연금 이사장 "기금형 참여는 필수"…3배 수익률 공언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 23일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금형 퇴직연금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로, 거대 기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성과를 낸 국민연금의 참여는 필수"라며 "민간 금융기관 간 경쟁을 촉진하는 메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사정 태스크포스(TF)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공식 합의한 직후 나온 발언으로, 참여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국민연금이 내세우는 근거는 수치 대비 성과 지표다. 2025년 기준 국내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6.47%인데 반해, 같은 기간 국민연금 수익률은 18.80%를 기록했다. 김 이사장은 "퇴직연금 적립금 500조원에 수수료가 2조원인 반면 국민연금은 기금 1천600조원에 수수료가 3조원"이라며 "국민연금이 참여할 경우 기존 대비 3분의 1 수준의 수수료에 3배 이상의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는 오는 7월까지 세부 제도를 설계하고 연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후속 조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1천610조원의 자산을 굴리는 국민연금공단 등 공적 연기금을 기금형 퇴직연금 운용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두고 찬반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대박 나도 내 연금은 그대로" vs "퇴직연금 1%가 노후 좌우"
국민연금은 법으로 정해진 산식에 따라 수령액이 결정되는 '확정급여(DB)형' 구조인 만큼, 기금이 아무리 고수익을 올려도 가입자 개인의 연금 수령액은 단 1원도 늘어나지 않는다. 반면 퇴직연금(DC형·IRP)은 수익률이 곧 퇴직 시점에 손에 쥐는 퇴직금 그 자체다. 단 1%의 수익률 차이가 은퇴 시점 통장 잔고의 수천만 원을 좌우하는 구조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수십 년을 묻어두고 장기 버티기가 가능하지만, 퇴직연금은 이직·퇴사 시점에 반드시 현금화해야 한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며 "이 차이를 도외시한 채 수익률 숫자만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라고 지적했다.
'들쭉날쭉' 널뛰는 수익률…은퇴 시점 따라 퇴직금 '복불복'
기금형 구조가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경로는 결국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 확대로 귀결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는 증시 환경에 종속되는 극단적인 변동성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점에서 퇴직연금에는 특히 치명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국민연금의 연도별 수익률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 2022년 국민연금은 글로벌 공급망 혼란과 전쟁 장기화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 주요국 중앙은행의 공격적 긴축 기조 속에서 -8.22%라는 역대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79조6천억원의 손실을 냈다. 반면 바로 이듬해인 2023년에는 글로벌 증시 반등에 힘입어 13.59%의 기록적인 수익률을 달성했다.
한 해 차이로 약 22%포인트의 간극이 발생한 것이다. 국민연금이야 수십 년을 장기 운용하며 이 변동성을 평준화할 수 있지만,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퇴사하는 바로 그 시점의 수익률로 정산해야 한다. 2022년처럼 증시가 폭락한 '재앙의 해'에 명예퇴직이나 은퇴를 맞이한 근로자라면 공격적 자산배분 포트폴리오에 묶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일해 모은 퇴직금이 수천만원씩 깎이는 손실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구조다.
기금형 전환에 대한 가입자들의 거부감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5년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501조4천억원 중 75.4%에 해당하는 378조1천억원이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는 대다수 가입자가 원금 손실을 극도로 기피하는 보수적 성향을 지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기금형으로 강제 전환될 경우 이러한 가입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위험자산 비중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 위험을 가입자 모두가 동일하게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상위 10% 가입자 평균 수익률은 19.5%에 달한 반면, 하위 10% 가입자 평균 수익률은 0.5%에 그쳐 격차가 19%포인트에 달했다.
투자 판단 능력과 정보 접근성에 따라 같은 시장 환경에서도 누군가는 고수익을 올리고, 누군가는 사실상 손해에 가까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기금형 전환이 이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검증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관치 리스크·증시 안전판 악용 우려 금융권 반발
보다 구조적인 문제는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구조에 내재된 '정부 입김' 리스크라는 시각도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등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우려는 금융권에서도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환율 방어뿐만 아니라 국내 주식시장 방어에도 이용되고 있고, 만약 매도 시점이 올 때 국민연금의 매도 물량을 받게 되는 퇴직연금 가입자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면서 "자본시장이 가야 할 방향이 맞는지, 퇴직연금 생태계에 들어오는 게 건전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고 전했다.
국민연금의 운용 실체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된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중 상당 부분은 미래에셋증권, 삼성자산운용 민간 투자운용사에 위탁해 굴리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공공의 간판'을 달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돈을 굴리는 손길은 기존 민간 금융사라는 뜻이다. 형태만 기금형으로 바꾼다고 수익률이 마법처럼 오르지 않는 본질적 이유로 지적된다.
연금업계의 한 전문가는 "국민연금은 지금 국내 주식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져 있고, 나중에 연금 수급자가 늘어나면 국내 주식을 계속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며 "아랫돌 빼서 윗돌 메꾸는 식으로 국민연금에서 매도한 물량을 퇴직연금이 받아주는 구조를 누군가 그림 그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혹에 힘을 싣는 현실적인 수급 이슈도 불거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코스피 급등으로 국내 주식 비중이 목표치(20.8%)를 크게 초과하면서 6월 말까지 리밸런싱을 한시 유예했으나, 오는 7월부터 최대 60조원 규모의 국내 주식 매각을 재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에서는 이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질 경우 국내 증시에 상당한 충격이 불가피한 만큼, 퇴직연금이 그 물량을 받아주는 '완충 역할'로 활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지난 25일 청와대 제39차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며 "퇴직연금을 사용자 측면의 안정성, 근로자 스스로 지키는 안정성,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전문성 등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눠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지시하면서 정부 주도의 기금화 드라이브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업계에서는 순수한 수익률 극대화가 아닌 정책적 의도가 개입된 제도 개편이 자칫 가입자의 노후 자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 시장을 선점해 온 은행, 증권, 보험 등 민간 금융업계는 국민연금의 진입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을 전담해 온 근로복지공단 역시 영역 침범을 우려하며 꺼리는 기류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려한 숫자보다 '감시 시스템' 구축이 선결과제
전문가들은 지금 퇴직연금 시장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거대 공룡을 시장에 진입시켜 변동성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운용사들을 상시 평가하고 퇴출할 수 있는 강력한 수탁자 책임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금업계의 한 전문가는 "기금형을 도입하는 목적이 수익률을 높이려는 것인데, 정작 수익률이 진짜 높아지는지, 가입자들이 운용권을 기금에 전부 맡기는 선택을 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에 아무도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정이 하반기에 퇴직연금 기금화 입법화에 본격적으로 나서면 수익률 상승 외에도 '증시 안전판' 역할에 대한 찬반 격론이 뜨거워질 전망이다.
퇴직연금 분야의 한 전문가는 "노·사·전문가로 구성된 수탁법인이 운용사를 철저히 평가하고 성과가 나쁠 경우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독립적 거버넌스 체계가 선결과제"라며 "화려한 수익률 수치에 현혹돼 변동성과 관치 리스크를 간과한다면, 기금형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노후 보장책이 아닌 노후 자금을 흔드는 가장 위험한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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