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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⑬] ‘선택’을 강요하는 디폴트옵션은 "디폴트가 아니다"

가짜와의 결별... "환자에게 수술법을 고르게 하는 비극을 끝내야 한다"

2026-01-22 14:43:45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이미지 확대보기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지난 12편에서는 퇴직연금 거버넌스의 핵심인 ‘의사결정체계’와 ‘수탁자 책임’을 다뤘다. 이번 13편에서는 이 거버넌스 원칙이 가장 실무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지점인 ‘디폴트옵션(Default Option)’을 해부한다. - 편집자 주

2025년 한 해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의 ‘게으른 존(John)’과 한국의 ‘부지런한 김 부장’의 퇴직연금 계좌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미국의 존은 입사 이후 단 한 번도 연금 자산에 손을 대지 않았고, 2025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금융 지식이 부족한 자신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시스템을 신뢰했다. 미국의 QDIA(적격디폴트옵션)는 존을 대신해 전문가의 처방전인 TDF(타깃데이트펀드)를 실행했다. 2025년 미국 증시의 견조한 성장 속에서 대표적인 TDF 펀드들은 연 15%에 달하는 경이로운 수익을 기록했다. 존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전문가의 '대리 결정' 덕분에 풍요로운 은퇴 설계에 안착했다.

반면, 한국의 김 부장은 2025년 내내 퇴직연금 알림톡에 시달려야 했다. “디폴트옵션 상품을 직접 선택하라”는 압박 때문이었다. 이는 환자에게 "10여 개의 수술법 중 하나를 직접 골라 서명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김 부장은 손실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연 3.2% 수준의 정기예금 상품에 체크했다. 부지런히 고민하고 직접 선택한 결과였으나, 물가상승률과 세금을 고려하면 그의 노후 자산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이었다. 존과 김 부장의 수익률 격차는 단순한 운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유무가 가른 필연적 결과였다.

한국의 디폴트옵션, 환자에게 칼을 쥐어주는 형용모순
디폴트(Default)의 본질은 “가입자가 선택하지 않아도(Default), 전문가가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사전지정운용제도’는 가입자가 사전에 반드시 특정 상품을 ‘직접 선택’해야만 작동한다. ‘선택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미리 선택해두라’는 이 기이한 설계는 디폴트옵션의 정의 자체를 부정하는 형용모순이다.

이는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어떤 메스를 쓸지 직접 정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전문가인 환자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뻔하다. 당장의 통증이나 손실이 두려워 근본적인 치유(자산 증식)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현재 한국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약 90%가 초저위험 원리금 보장 상품에 쏠려 있는 것은, 국가가 가입자에게 전문가의 처방이 아닌 '자가 진단'을 강요한 결과다. 12편에서 강조한 거버넌스가 부재하니, 그 책임을 가입자에게 고스란히 전가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QDIA, 거버넌스가 보증하는 ‘전문화된 처방’
미국의 디폴트옵션인 QDIA가 강력한 이유는 상품의 수익률 때문만이 아니다. 그 바탕에 앞서 언급한 거버넌스와 수탁자 책임이라는 의료진 수준의 전문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부(DOL)는 원리금 보장 상품을 원칙적으로 QDIA에서 제외한다. 그것은 노후 빈곤이라는 병을 고칠 수 없는 '설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부작용(손실 위험)이 있을 수 있는 처방을 어떻게 가입자 동의 없이 자동으로 내릴 수 있는가?” 그 답 역시 거버넌스다. 기업 내 ‘투자위원회’라는 전문가 집단이 가입자의 은퇴 시점을 진단하여 상품을 엄선하고, 그 처방에 대해 무거운 ‘수탁자 책임’을 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의사가 오진에 대해 책임을 지듯, 위원회는 오직 가입자의 이익만을 위해 결정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진다. 가입자는 이 '책임지는 시스템'을 믿고 선택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자가 진단’을 끝내고 ‘전문가 처방’으로
이제 우리는 가입자에게 선택을 구걸하는 ‘가짜 디폴트’와 결별해야 한다. 개선안은 명확하다.

첫째, 가입자의 ‘사전 선택’ 절차를 폐지해야 한다. 가입자가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기업 내 거버넌스 기구가 처방한 최적의 상품으로 자동 투자되는 ‘진짜 디폴트(Opt-out)’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 보장 상품을 퇴출해야 한다. 미국이 그러하듯, 디폴트옵션은 장기적인 노후 자산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실적배당형 상품에 한정되어야 한다. 안전이라는 핑계로 자산을 방치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전문가의 직무유기다.

셋째, 수탁자 책임을 법제화해야 한다. 가입자의 선택권을 가져오는 대신, 그 결정을 내리는 기업과 전문가 위원회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시스템이 처방했으니, 시스템이 결과에 책임진다”는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

전문가의 처방이 노후를 살린다

거버넌스는 퇴직연금이라는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가입자에게 내리는 ‘전문가의 처방전’이다. 환자가 무섭다는 이유로 수술을 거부하거나 스스로 약을 고르게 내버려 두는 의사는 좋은 의사가 아니다. 진짜 전문가라면 환자를 설득하고 책임지며 최선의 치료법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가입자들은 수술대 위에서 어떤 메스를 고를지 몰라 떨고 있다. 이제는 전문가라는 거버넌스가 칼자루를 넘겨받아야 한다. 물론 그 처방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할 권리, 즉 거부권은 언제나 가입자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가입자가 ‘선택하지 않아도 전문가가 설계한 거버넌스가 최선의 처방을 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2005년 도입 당시 놓쳤던 거버넌스의 본질이자, 1,500조 연금 강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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