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검색

epic-Column

나라 빚은 정말 청년에게 향하는가

2025-10-16 09:04:11

김한샘 알케미랩 대표이사. 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샘 알케미랩 대표이사.
[김한샘 알케미랩 대표이사] 국가 채무는 흔히 ‘나라 빚’이라고 불리고, 자연스럽게 “결국 청년이 갚게 될 짐”으로 이어진다. 개인에게 빚은 미래 소득을 당겨 쓰는 일이고 언젠가는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니 불안이 생긴다. 이 직관은 틀리지 않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부채의 성격과 경제 전체에서의 위치다. 모든 부채가 같은 빚은 아니다. 어디에 있는 빚인지, 무엇에 쓰였는지에 따라 같은 규모의 차입도 미래에 남기는 것이 전혀 달라진다.

경제를 통으로 보면 부채에는 위계가 있다. 생산성을 키우는 곳에 투입되는 기업의 대출은 그 자체로 미래의 임금과 이익, 세수로 되돌아오며, 제대로 설계된 정부의 재정은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 기반을 깔아 주고 경기의 충격을 완충한다. 반대로 가계의 빚은 대개 소비와 주거 비용을 메우는 성격이 강하고, 상환 압력은 다음 분기의 소비와 기회를 먼저 갉아먹는다. 같은 빚이라도 기업과 정부가 장기 시야로 감당할 때는 투자에 가깝고, 가계가 짊어질 때는 취약성이 커지기 쉽다.
한국의 위험지형을 이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중심이 보인다. 장부상 ‘국가 채무’의 절대 규모보다 민간, 특히 가계 쪽으로 무게가 과하게 실린 구조가 더 아프다. 정부의 채무 비율은 국제 비교에서 높지 않은 편이지만, 가계와 기업의 레버리지는 길게 누적됐다. 금리나 경기가 흔들릴 때 먼저 움츠러드는 곳이 민간인데, 그 수축은 소비와 투자, 고용과 소득, 나아가 세수까지 연쇄적으로 위축시킨다. 숫자의 크기보다 빚이 어디에 얹혀 있는지가 체력과 직결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해법은 총량을 무조건 줄이는 일이 아니다. 빚의 위치를 위험한 곳에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핵심이다. 과도한 가계 레버리지를 정부와 기업의 더 긴 호흡으로 흡수하고, 그 자금을 미래 소득을 키우는 용도로 돌리면 전체 위험이 더 빨리 낮아진다. 정부는 더 낮은 금리와 더 긴 만기로 조달하고, 필요하면 차환으로 상환 일정을 조정할 수 있으며, 기업은 투자를 통해 부채를 생산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반대로 가계는 소득이 한정적이고 협상력이 약해 충격을 정면으로 맞는다. 같은 1조원의 차입이라도 누구의 대차대조표에 올라가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다.

논란이 많았던 민생회복지원금도 이 틀에서 보면 해석이 바뀐다.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부채가 늘지만, 동시에 가계의 연체 위험과 고금리 상환 부담이 줄어들고 소비절벽을 막는 완충재가 생긴다. 지역 상권과 자영업의 매출이 회복되면 현금흐름이 개선되고 세수 기반이 넓어지며, 청년 고용과 창업 생태계를 떠받치는 수요가 유지된다. 거시적으로 보면 정부의 레버리지가 증가하는 대신 가계·자영업 부문의 리스크가 줄어드는 교환이 일어나고, 국가 위험은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
물론 전제가 분명해야 한다. 지원의 목적이 명료해야 하며, 설계 단계의 가설이 집행 과정에서 측정 가능한 지표로 추적되어야 한다. 실제로 가계의 디레버리징과 영세·자영업자의 소득 회복으로 이어졌는지, 지역별 효과가 어떻게 달랐는지, 종료 이후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할 때 비로소 지출은 투자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이 흐릿하면 좋은 의도가 나쁜 빚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정책의 성패는 얼마를 풀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어떤 순서로, 어떤 질로 썼느냐에 달려 있다.

청년에게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싶다. 국채가 조금 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청년의 재앙은 아니다. 그 빚으로 무엇을 남겼는가가 본질이다. 교육과 보건, 인적자본과 기술, 인프라처럼 미래의 납세능력과 생산성을 키우는 곳에 투입됐다면, 장부상의 채무는 늘어도 경제의 체질은 더 안전해질 수 있다. 반대로 가계가 짊어진 과도한 주택대출과 생활비 대출을 그대로 두면 소비를 줄이고 결혼과 출산을 미루며 사회적 비용이 커진다. 빚을 피할 수 없다면, 청년이 직접 짊어지기보다는 정부와 기업이 더 긴 시간에 나눠 감당하고, 청년에게는 역량과 시간, 기회를 남겨야 한다.

결국 우리의 논쟁은 공포의 크기를 겨루는 일이 아니라 운영의 품질을 겨루는 일로 옮겨가야 한다. 부채의 최적 위치는 기업 다음 정부, 그리고 마지막이 가계다. 지금 한국의 과제는 빚의 무게중심을 가계에서 정부와 기업으로 일부 이동시키고, 그 자금을 미래 소득을 키우는 곳에 투입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숫자상의 부채는 늘어도 삶의 안전도는 높아지고, 청년에게 향하던 빚의 그림자는 서서히 옅어진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것은 ‘빚’이 아니라 그 빚이 만들어낼 역량과 시간, 그리고 기회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리스트바로가기

Pension Economy

epic-Who

epic-Company

epic-Money

epic-Life

epic-Highlight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