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연금 총적립금은 전년 대비 49조 3천억원(12.9%) 증가하며 3년 연속 13% 수준의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자금은 정작 가입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물가상승률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저조한 수익률과 가입자의 무관심, 그리고 각종 규제에 안주하며 투자성과 개선에 소홀했던 퇴직연금사업자들의 안일한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런데 최근 안도걸 의원이 대표 발의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이 모든 것을 바꿀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고 있다. 이 법안의 핵심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 룰을 '누가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느냐'에서 '누가 더 좋은 수익률을 내느냐'로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퇴직연금 시장은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마치 식당들이 음식 맛은 개발하지 않고 전단지 배포나 인테리어 변경에만 열을 올리는 것과 같았다. 회사가 특정 금융기관과 계약하면 근로자는 수익률이 형편없어도 그 기관의 상품 안에서만 맴돌아야 했다. 경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였던 셈이다.
안도걸 의원안은 이런 낡은 구조를 네 가지 혁신적 장치로 완전히 뜯어 고친다.
첫 번째 변화는 가입자에게 '선택권'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어준 것이다. 중소기업이 아닌 사용자는 의무적으로 3개 이상의 퇴직연금사업자와 계약해야 하고, 근로자는 이들 중에서 자신의 퇴직연금을 맡길 사업자와 기금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2년에 1회 이내에서 손쉽게 갈아탈 수 있도록 보장한다. 이제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더 이상 '잡아놓은 고객'을 안일하게 대할 수 없게 됐다.
두 번째는 '퇴직연금기금전문운용사'라는 새로운 전문가 집단의 탄생이다. 지금까지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고객 유치부터 계좌 관리, 자산 관리까지 모든 역할을 한 몸에 수행하는 '만능 재주꾼'이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운용 전문성은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제도는 마치 종합병원에서 진료와 수술, 약 처방까지 모두 하던 의사가 이제 자신의 전문 분야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과 같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고객 관리라는 '병원 행정' 역할을 맡고, 자산운용이라는 고도의 업무는 '전문 외과의'인 퇴직연금기금전문운용사가 전담하게 된다.
새 법안은 모든 사업자에게 매년 운용현황과 수익률을 투명하게 공시하고 가입자에게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는 모든 선수들의 성적을 대형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띄우는 것과 같다. 이제 가입자들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각 운용사의 수익률을 명확하게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네 번째는 운용 책임을 개인에게서 전문가에게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기존 확정기여형 제도는 가입자에게 여러 상품 목록을 던져주고 '알아서 선택하라'는 방식이었다. 금융 지식이 부족한 대다수 가입자는 결국 가장 안전해 보이는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했고, 이는 저수익률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결국 안도걸 의원안은 '선택권 부여', '전문가 도입', '성과 공시', '책임 전환'이라는 네 가지 강력한 톱니바퀴를 통해 수십 년간 멈춰 있던 퇴직연금 시장이라는 거대한 시계를 '성과 중심'이라는 새로운 시간 축으로 움직이게 할 것이다.
이제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 힘차게 걷기 시작할 때다. 그 발걸음의 끝에는 가입자들의 풍요롭고 안정된 노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431조원이라는 거대한 자금이 마침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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