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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두산 130년 변신 DNA를 파헤친다

포목점에서 맥주→건설→중공업, 이제는 '반도체 메이저' 꿈꾸다

2025-11-18 15:08:55

박정원 회장이미지 확대보기
박정원 회장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2025년 10월, 두산그룹은 또 한 번의 대담한 도전을 시작했다. 세계 3위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 SK실트론의 인수 의사를 공식화한 것이다. 부채 3조원의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지 불과 5년, 두산은 이제 반도체를 핵심 사업으로 삼기 위해 약 1조50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2007년 두산밥캣 인수로 유통업에서 중공업으로 체질을 바꾼 이후 가장 큰 결정이다.

두산의 이러한 변신은 단순한 사업 다각화가 아니다. 130년을 이어온 기업의 생존 DNA이자, 위기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경영 철학의 결정판이다. 창업주 박승직이 1896년 포목점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화장품(바가분), 맥주(오비맥주), 건설, 중공업, 그리고 이제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산업을 넘나들며 살아남아왔다. 각 시대마다 필요한 사업으로 변신해온 두산의 능력이 반도체 시장이라는 새로운 전장에서 다시 발휘되려 하고 있다.
위기에서 비롯된 기회: 구조조정 이후의 도약

두산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게 된 배경에는 2020년의 구조조정이 있다. 당시 두산밥캣 인수 자금으로 인한 부채와 두산건설의 미분양으로 인한 누적 손실 3조 원이 겹쳐진 상황에서,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던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마저 탈원전 정책으로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당시 그룹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채권단의 고강도 구조조정 요구에 따라 두산은 핵심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를 매각했고, 2022년에 채권단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다.

이때 두산이 주목한 것은 위기 속에 숨겨져 있던 기회였다. 그룹은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 구조를 재편하면서 동시에 미래 사업을 설계했다. 클린에너지, 스마트머신, 그리고 반도체·첨단소재라는 3대 성장축이 그것이다. 특히 반도체는 2023년부터 AI 혁명이 가속화되면서 전략적 가치가 급상승했다.
AI 열풍을 탄 반도체 사업의 도약

현재 두산의 반도체 사업은 생각보다 견실한 기반 위에 서 있다. 두산 전자BG 사업부는 동박적층판(CCL)을 생산하는데, 이는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핵심 소재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이 제품이 납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4년 4분기부터 본격적인 실적 개선이 시작됐다. 전자BG의 2024년 매출은 지난해 1조 72억 원을 크게 상회했으며, 특히 엔비디아향 CCL 매출이 월 평균 300억 원의 예상치를 훨씬 초과하여 분기 마다 1천억 원대를 기록했다. 증권가의 2025년 엔비디아향 CCL 매출 예상치도 당초 3,500억 원에서 5,000억 원 이상으로 상향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칩인 '루빈' 개발에 두산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6년 3분기부터 독점 공급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아, 이는 두산에게 새로운 성장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2년에 인수한 두산테스나는 반도체 후공정 테스트 분야의 국내 최강자다. 초기에는 부진했지만, 고화소 이미지센서와 차량용 반도체 테스트 수요가 확대되면서 2025년 3분기 흑자 전환이 예상되고 있다. 박정원 회장이 선언한 2027년까지 1조 원 투자로 '글로벌 톱 5' 달성이라는 목표 하에, 1,714억 원 규모의 테스트 설비 투자가 진행 중이다.

웨이퍼 제조로 밸류체인 완성: SK실트론 인수의 전략적 의미

SK실트론은 반도체 웨이퍼 제조 전문기업이다. 반도체 칩의 기초가 되는 웨이퍼는 전체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가장 상위 공정에 해당한다. SK실트론은 세계 3위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2024년 기준 연간 EBITDA가 약 7,000억 원으로 안정적인 현금 창출 능력을 보유했다. 무엇보다 SK하이닉스라는 주요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어 수요의 안정성이 담보된다.
SK실트론의 기업가치는 약 5조 원으로 평가되며, 인수 대상은 SK가 보유한 경영권 지분 70.6%다. 부채 3조 원을 제외한 실제 지분 인수에 필요한 자금은 1조 5천억~2조 원 수준으로, 이는 두산이 2020년 구조조정 이후 처음 시도하는 대규모 M&A다.

만약 이 인수가 성공한다면, 두산의 반도체 사업 구조는 완전히 달라진다. 현재 1조 원 수준인 반도체·첨단소재 매출은 단숨에 3조5000억 원 이상으로 증가한다. 두산 전자BG(소재)에서 시작해 SK실트론(웨이퍼)을 거쳐 두산테스나(후공정 테스트)로 이어지는 완전한 반도체 밸류체인이 구축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반도체 생태계를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대담한 자금 조달 전략: 지주사 탈피의 의미

두산이 SK실트론 인수에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철저한 준비 과정에 있다. 2025년 초만 해도 별도 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이 1,487억 원에 불과했던 두산은, 6월 말에 무려 1조 7,380억 원으로 증가시켰다. 3개월 사이에 1조 원 이상의 현금을 확보한 것이다.

이 현금은 두산로보틱스와 두산에너빌리티 등 우량 자회사의 지분을 담보로 한 차입으로 조달됐다. 특히 주가수익스와프(PRS) 방식을 활용하여 지분 희석 없이 유동성을 확보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두산은 지주회사 지위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기까지 했다. 지주사는 부채비율이 200% 이하로 제한되지만, 이 규제에서 벗어나면서 투자 자유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러한 결정은 두산의 SK실트론 인수 의지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일부 재계 관계자는 "단순한 의향 표명이 아니라, 지주사 지위마저 내려놓을 정도로 두산이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시장의 반응과 주가의 부활

두산의 반도체 공략이 주가에 반영되는 속도도 빨랐다. 10월 2일 SK실트론 인수 의사 발표 당일 두산 주가는 5.8% 상승했으며, 이후 11월까지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2023년 7만2000원에서 시작한 주가는 현재 100만 원을 넘어서며 약 8배 이상 폭등했다.

2025년 11월 현재 주가는 93만 원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증권사들의 목표주가도 일제히 상향 조정되고 있다.

증권가의 상향 조정은 반도체 사업의 미래 수익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DS투자증권의 목표주가는 150만 원, 유진투자증권은 137만 원, 메리츠증권은 135만 원으로 설정했다.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내년에도 AI 가속기와 800G 중심의 네트워크 매출이 확대되고, 반도체 소재 수요가 계속 성장할 것"이라며 긍정적 전망을 유지했다.

M&A DNA의 재현: 역사가 증명하는 두산의 능력

두산의 이번 도전이 특별한 이유는 과거의 성공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두산밥캣 인수는 당시 4조 5천억 원이라는 거액이었지만, 이후 두산 그룹 연결 매출의 47%를 견인하는 핵심 사업이 됐다. 2000년 한국중공업 인수로 탄생한 두산에너빌리티는 현재 40% 이상의 매출 기여도를 자랑한다.

두산은 M&A 분야에서 '부장급 경력자'라고 평가받는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기업 인수와 매각을 경험해온 두산의 직원들은 대규모 M&A에서 능숙함을 발휘했다. 두산 출신의 회계팀 담당자들이 다른 회사에서도 성공하는 사례가 많은 것은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다만 두산도 실패의 경험이 있다. 2020년의 구조조정은 사실상 대규모 M&A의 실패에 따른 대가였다. 그러나 두산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경영진이 과거의 교훈을 충분히 학습했다고 볼 수 있다.

3대 성장축의 균형 전략

SK실트론 인수는 두산의 3대 성장축 전략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린에너지(두산에너빌리티)는 원전 친화 정책의 전환과 가스터빈 수출 호황에 힘입어 이미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2025년 수주 가이던스를 13조~14조 원으로 상향 조정한 점은 성장 탄력성을 입증한다.

스마트머신(두산밥캣, 두산로보틱스)은 북미 건설 경기의 호황과 AI·로봇 산업의 성장 가능성으로 안정적인 현금 창출이 기대된다. 두산밥캣은 연 8조 5천억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여전히 그룹의 최대 매출처다.

반도체·첨단소재는 이제 두 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준비가 되었다. SK실트론 인수 후 그룹 전체 매출은 20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며, 반도체 부문의 비중은 17%대로 상승한다. 이는 특정 사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경영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상되는 난제와 기대의 온도

물론 SK실트론 인수가 순탄하기만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인수가(1조 5천억~2조 원)가 높은 만큼 자금 부담이 적지 않으며, 반도체 산업의 변동성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두산테스나의 초기 실적 부진 사례에서 보듯이, 신사업이 즉시 수익을 내기는 어려울 수 있다.

또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극심하다는 점도 리스크 요인이다. 일본의 신에쓰화학, 섬코(SUMCO), 대만의 환상(Wafer)과 같은 글로벌 경쟁사들이 이미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산이 SK실트론과 함께 이들과 경쟁하면서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다만 업계 전문가들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SK실트론은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알짜 계열사며, 주요 고객인 SK하이닉스와의 관계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AI 칩 수요의 강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호재다.

영원한 불사조로의 초대

두산의 SK실트론 인수 추진은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130년 기업의 불사조 같은 생존 능력이 다시 한 번 발휘되는 순간이다. 화장품 부작용으로 위기에 빠졌다가 맥주로 돌아온 초대 창업주의 유전자가, 페놀 사건으로 흔들렸던 평판을 중공업으로 회복시킨 경영진의 결단이, 그리고 부채 3조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업으로 도약하는 현 경영진의 담대함이 모두 담겨 있다.

연말까지 주식매매계약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는 두산이 과연 이 도전에 성공할지,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주자로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입증하려는 두산의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는 점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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