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기금형 제도가 수익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만병통치약인 양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퇴직연금의 본질적 역할을 외면한 위험한 발상이다.
대법원 판례에서 명시하듯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후불임금'이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까지의 소득 공백기를 메우는 가교연금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만큼, 운용의 제1원칙은 공격적인 수익률 추구가 아니라 자산의 안전한 '보존'과 '증식'이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의 70% 이상이 원리금보장상품에 쏠린 현상을 '금융문맹'의 결과로 치부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한 시장보다 안정성을 택한 근로자들의 암묵적 집단지성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후불임금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는 근로자들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수익률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제도의 대수술을 감행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접근이다.
기금형 제도 도입론자들이 제시하는 청사진은 더욱 우려스럽다. 현재 거론되는 기금형은 개별 기업 또는 복수 기업이 모여 수탁법인을 설립하고, 이사회를 '노사 동수'로 구성해 자산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겉보기에는 굉장히 민주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사관계 현실을 고려할 때 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대립적인 노사문화가 팽배한 현실에서 노사 대표가 모인 이사회가 과연 전문적이고 합리적인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거나, 비전문적 판단으로 자산을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금융시장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장기적 포트폴리오 전략은 구호에 그치고, 의사결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별도의 수탁법인 설립과 운영에는 막대한 행정 비용이 수반된다. 이는 고스란히 근로자의 후불임금에서 차감되어 수익률을 갉아먹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운용 실패 시 책임 소재다. 손실 발생 시 노사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기나긴 공방을 벌일 것이 자명하고, 결국 피해는 애꿎은 근로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해외 사례가 주는 경고
금융 선진국들의 경험은 우리에게 명확한 경고를 보낸다. 일본의 AIJ 투자자문 사기 사건은 전문성 부족한 기금 이사회가 고수익 유혹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었다. 영국의 맥스웰 사건은 수탁자의 독립성과 윤리가 무너졌을 때의 참사를 경고한다. 미국에서는 수탁자의 잘못된 투자, 과도한 거래비용, 제도 변경에 따른 차별 등 운용과 지배구조 전반에 걸쳐 소송이 빈발했다.
호주가 기금형 제도인 '슈퍼애뉴에이션'을 성공시킨 배경에는 APRA라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감독기구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전문 감독기구가 없다. 준비되지 않은 감독 환경에서 기금형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안전장치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에 근로자의 노후를 맡기는 것과 같다.
더 큰 우려는 국민연금공단을 '공적 수탁법인 제공자'로 참여시키려는 움직임이다. 근로자 퇴직급여라는 사적 자산 운용에 공적 기구가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 시장 진입은 민간 금융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며,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퇴직연금 자산이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동원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자산 운용의 독립성과 효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근로자의 노후자산을 정부의 정책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노후를 위한다면, 부작용이 예견되는 제도의 급진적 전환보다는 현행 계약형 제도의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들에게 현재 로보어드바이저에 허용되는 일임형을 전면 허용하고 디폴트 옵션에 포함시키는 것이 첩경이다. 가입자 교육 강화, 운용사 정보공개 확대, 다양하고 안정적인 상품 개발 지원 등 현실적인 대안부터 착실히 이행하는 것이 근로자의 소중한 노후자산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현재 추진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은 '수익률 제고'라는 불확실한 목표를 위해 근로자의 자산보호, 자기결정권, 제도의 안정성이라는 대원칙을 내팽개치는 것이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지금의 기금형 논의는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제도 변경인가?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저작권자 ©GLOBALEPIC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