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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㉑] 왜 회사는 결국 다시 예금으로 돌아가는가?

2026-08-31 08:28:19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이미지 확대보기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⑲편에서는 적립금운용위원회가 회사의 퇴직급여 부채에서 목표수익률과 위험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했다. ⑳편에서는 여러 계좌를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보고 실행할 책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올바른 목표와 운용의 길이 열려 있어도, 의사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단기 손실의 책임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면 회사는 결국 다시 예금으로 돌아간다. 이번 편은 DB형 운용을 가로막는 마지막 열쇠인 ‘책임과 보호의 거버넌스’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다음 회의를 준비하던 김 부장(가명)은 퇴직연금사업자 담당자와 함께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지난 26일 발표한 ‘DB형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수익률 제고를 위한 정부지원 내용’을 읽고 있었다.
발표문의 핵심은 분명했다. 회사는 DB형 적립금의 목표수익률을 최소한 임금상승률 이상으로 설정하고, 퇴직급여 지급 일정에 맞춰 자산의 만기를 나누며, 퇴직연금사업자의 전문 컨설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권고였다.

김 부장도 정부의 문제의식에는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사업자가 내민 실적배당형 펀드와 장기채권 제안서를 넘겨보던 그의 손이 이내 멈춰 섰다.

“좋은 방법이라는 건 잘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꿨다가 손실이라도 나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대표이사였던 나도 결국 예금을 선택했다

필자는 김 부장의 이 뼈아픈 질문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 과거 한 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할 때, DB형 적립금의 실적배당형 투자를 직접 검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생 자산운용을 업으로 삼아온 전문가다. 예금만 기계적으로 반복하기보다 회사의 퇴직급여 지급구조에 맞춰 분산투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표이사로서 최종 결재판에 서명하려 하자, 지식만으로는 넘기 힘든 거대한 현실의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실적배당형 상품을 편입했다가 시장 충격으로 손실이 나면 어떻게 될까? 이사회와 주주, 그리고 임직원들에게 그 손실의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다. 실무자가 아무리 꼼꼼하게 기안을 올렸더라도, 최종 판단을 내린 대표이사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필자가 이끌던 회사도 예금 중심의 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전문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더 나은 선택이 가져올 먼 미래의 이익보다, 눈앞에 닥칠 단기 손실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DB형 적립금 운용은 김 부장 혼자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실무자가 자료를 준비하고, 재무책임자가 검토하며, 대표이사가 결단을 내리고, 적립금운용위원회가 목표와 위험을 심의한다. 최종적인 퇴직급여 지급 책임 역시 개인이 아닌 회사에 남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시스템은 이 의사결정의 사슬에 선 사람들을 지켜줄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마련해두지 않았다.

눈앞의 1% 손실은 보이고, 장기 부담은 숨겨져 있다

2025년 말 기준 DB형 적립금은 228조9천억원으로 전체 퇴직연금의 절반 가까이(45.7%)를 차지하지만, 이 중 무려 91.9%가 원리금보장형에 묶여 있다. 2025년 연간 수익률은 3.5%에 그쳤고, 최근 5년 누적 수익률(15.9%)은 같은 기간의 임금상승률(18.9%)을 밑돌았다.

DB형은 근로자의 퇴직 시점 임금에 맞춰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제도다. 적립금이 필요한 만큼 불어나지 못하면 회사의 추가 납입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원리금이 보장됐다고 해서 회사의 장기 부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책임의 가시성이 완전히 비대칭이라는 점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에서 발생한 단기 손실은 통장과 보고서에 마이너스 숫자로 즉시 드러난다. “누가 제안했고, 누가 검토해서, 왜 이 상품을 결재했느냐”는 문책이 곧바로 뒤따른다.

반면 필요한 목표수익률을 몇 년째 달성하지 못해 회사의 장기 부담이 커져도 그 원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존 관행대로 예금에 넣었을 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선택의 근거는 검토되지 않는다.

회사에 가장 좋은 선택과 의사결정자 개인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 엇갈리는 구조적 모순이다. 그래서 회사는 결국 다시 예금으로 돌아간다.

무행동의 비용을 묻고, 신중한 결정은 보호하라

이번 고용노동부 발표가 의미를 갖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가 ‘임금상승률’이라는 잣대를 제시하며, 목표에 미달하는 낮은 수익률에 머무는 것이 결코 무손실이 아니라 회사의 미래 부담을 키울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가 임금상승률 미달 자체를 곧바로 처벌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정기감독과 과태료의 직접 대상은 법정 최소적립금을 채우지 못한 사업장이며, 임금상승률은 기업별 인력구조와 퇴직률, 적립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목표수익률을 세울 때의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기존의 예금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는 ‘무행동’에도 엄연히 비용과 책임이 따른다는 점이다.

이제 회사는 두 방향의 책임을 함께 세워야만 한다.

먼저 경영진과 이사회, 주주들이 “왜 우리 회사는 필요한 목표수익률을 맞추지 못해 추가 부담을 키우고 있는가?”를 감시해야 한다. 목표 미달이 지속되는데도 아무런 원인 분석 없이 관행적으로 예금만 반복했다면 그 무행동의 근거를 따져 물어야 한다.

동시에, 신중한 절차를 거친 결정을 조직이 지켜주어야 한다. 위원회가 심의한 목표와 허용위험한도 안에서, 객관적인 비교자료와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회사가 결정했다면, 일시적인 단기 손실만을 이유로 담당자나 결정권자에게 책임을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보호의 대상은 김 부장 한 사람만이 아니다. 정해진 권한 안에서 기안을 올린 실무자, 이를 검토한 재무책임자, 경영 결단을 내린 대표이사, 목표와 위험을 심의한 위원회까지, 신중한 의사결정의 사슬에 참여한 모든 이가 같은 원칙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미국 기업연금법(ERISA)이 강조하는 ‘절차적 신중성’의 원리도 같다. 일시적인 손익만으로 수탁자의 신중성을 판단하지 않고, 당시 이용할 수 있었던 정보와 전문가의 조언을 충분히 검토했는지, 운용자를 신중하게 선정하고 감독했는지를 본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이제 퇴직연금 운영규정과 가이드라인에, 정해진 절차를 충실히 지킨 결정에 대해서는 일시적 손실을 이유로 부당한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절차적 보호 기준’을 명시해야 한다.

전문가 제안서를 통해 기록을 명확히 남겨야 한다

외부 컨설팅회사나 퇴직연금사업자의 제안서를 받는 이유는 개인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의 분석과 권유에 근거해 신중하게 결정했다”는 객관적 증거를 회사의 공식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그리고 전문가에게 그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전체 적립금의 만기와 집중위험, 대안별 기대수익과 비용을 일관된 기준으로 비교하도록 해야 하며, 특정 상품을 추천하거나 제외한 이유, 이해상충 여부를 투명하게 밝히게 해야 한다.

위원회는 목표와 위험을 심의하고, 회사는 전문가를 신중하게 선정·감독하며, 경영진은 권한에 따라 판단하고, 실무자는 정해진 기준 안에서 집행한다. 전문가를 활용한다는 것은 각자의 권한에 맞게 책임을 나누고 신중한 판단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회사의 결정을 지켜줄 다섯 가지 안전장치

다음 회의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단순한 금리 비교표가 아니다. 적립금운용계획서와 회의록에 다음 다섯 가지가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1. 부채와 장기 부담 : 임금상승률과 퇴직 일정을 고려한 목표수익률, 미달 시 회사가 감당해야 할 추가 부담액.

2. 객관적 대안 비교 : 예금 유지안을 포함해 검토한 모든 자산 대안의 기대수익, 위험, 비용의 객관적 대조표.

3. 전문가 자문 근거 : 외부 전문기관이나 사업자의 제안서를 통한 자산배분 사유 및 이해상충 검증 기록.

4. 권한과 결정 기록 : 위원회가 심의하고 회사가 확정한 허용위험한도, 그리고 담당자의 집행 범위를 명시한 회의록.

5. 다년 평가와 보호 원칙 : 1년 단위 손익에 얽매이지 않는 중장기 누적 성과 평가와, 신중한 절차를 거친 집행에 대한 보호 기준.

이 다섯 가지 기록이 갖춰진다면 회사는 원칙에 맞는 결정을 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위원회가 목표와 위험을 심의했고, 전문가의 자문과 객관적 비교를 거쳐 회사가 결정했으며, 우리는 그 정해진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집행했습니다”

이 기록은 김 부장 한 사람의 방패가 아니라, 회사의 의사결정선 전체가 어떤 근거와 절차로 판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거버넌스가 살아날 때 퇴직연금도 깨어난다

거버넌스는 손실을 없애주는 마술 지팡이가 아니다. 누가 목표를 세우고, 누가 실행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평가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자를 보호할 것인가를 정하는 약속의 시스템이다.

⑲편에서 회사의 부채에 맞춰 목표를 세웠고, ⑳편에서 전체 포트폴리오를 운용할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 ㉑편에서 신중한 결정을 조직이 보호하고 무행동의 기회비용을 평가하는 책임의 뼈대를 완성했다.

이 거버넌스의 순환이 완성될 때 DB 제도를 선택한 회사는 예금만이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기지 않고, 근로자와 회사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운용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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