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11일 금융권에 따르면, 치열했던 수주전 끝에 대표 간사 자리를 거머쥔 곳은 삼성생명으로 확인됐으며, 22개 금융사가 사업자 명단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여신 관계가 촘촘히 얽힌 시중은행 대신 보험사에 간사직을 맡긴 배경에는 은행권 파트너십 훼손을 우려한 대한항공 경영진의 정교한 안배가 작동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3월 정관 변경 후 석 달 만에 완료…5월 RFP·6월 초 22개사 확정
대한항공은 지난 3월 26일 열린 제64기 정기주주총회에 '퇴직연금 제도 도입 대비 변경의 건(정관 일부 변경)'을 특별결의 안건으로 상정했다. 해당 안건은 출석 주식 기준 찬성률 100.0%(발행주식총수 대비 57.3%)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며 제도 개편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미 퇴직연금을 운용 중인 아시아나항공 측과 인사·복리후생 체계를 통합 전에 일원화해야 한다는 실무적 필요가 정관 변경을 서두른 배경으로 꼽힌다.
이후 국토교통부가 6월 25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법인 합병을 조건부로 인가하면서 마지막 행정 절차까지 마무리했고, 통합 대한항공은 오는 12월 17일 공식 출범을 앞두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가 지난해 8월 발표한 단계적 퇴직연금 의무화 로드맵도 결정을 앞당긴 요인으로 꼽힌다. 내년부터 10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만큼, 정부 추진 기조에 발맞추는 한편 대기업인 대한항공으로서는 통합 출범 전 선제적으로 제도 전환을 마쳐 두려는 유인이 컸다는 분석이다.
대한항공은 5월 금융권을 대상으로 제안요청서(RFP)를 공식 발송했고, 접수 한 달 만인 6월 초 삼성생명을 대표 간사로 낙점함과 동시에 22개 금융사를 사업자로 최종 확정했다.
확정급여채무의 현재가치는 올해 3월 말 분기보고서 기준 2조2천362억원, 사외적립자산의 공정가치는 915억원으로, 순확정급여부채는 2조1천447억원으로 집계됐다.
대규모 적립금이 일시에 사외로 이전되는 대형 딜이었던 만큼, 유치권을 둘러싼 은행·증권·보험사 간 물밑 영업전은 사활을 건 양상으로 치달았다.
수주전의 최대 분수령이었던 대표 간사 자리를 꿰찬 곳은 삼성생명이었다. 대한항공이 기존에 퇴직보험을 가입해 온 금융사가 삼성생명이었다는 점도 이번 선정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퇴직연금 대표 간사는 적립금 관리 서비스와 대표 지급 등 제반 실무를 총괄하며 타 사업자 대비 우위의 수수료 수입을 챙길 수 있다. 특히 초기 제도 설계 단계에서 자사에 유리한 상품 구도를 조성할 수 있어 금융사들이 가장 열망하는 자리로 꼽힌다. 그런 만큼 이번 대한항공 수주전에도 여러 금융사가 각축전을 벌였다.
대한항공의 주거래은행인 KDB산업은행은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을 10.58% 보유하고 있어 여신과 지분 관계가 특수하게 얽혀 있다. 이 때문에 국책은행으로서의 이해상충 방지 및 형평성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애초 간사 후보군에서 배제된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금융권 안팎에서는 대한항공과 다양한 여수신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 시중은행 중 한 곳이 간사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실제 간사 자리는 보험사인 삼성생명에게 돌아갔다.
한 금융권 연금컨설팅 관계자는 "대한항공은 항공기 도입 및 운항 자금 조달 등을 위해 시중은행들과 대출 등 여신 거래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특정 은행을 간사로 세우면 '왜 저쪽만 챙겨주느냐'며 다른 은행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반발할 우려가 커, 윗선에서 은행을 배제하고 보험사인 삼성생명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삼성생명은 은행 간 과열 경쟁이 빚어낸 틈새에서 대표 간사 자리를 안게 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MOU로 이어진 한진-삼성 동맹…4개 항공계열사·5개 금융사 결합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번 간사 선정이 단순한 퇴직연금 수주전을 넘어 한진그룹과 삼성금융그룹 간 구축된 전방위 전략적 동맹과 밀접하게 결합돼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실제로 대한항공이 삼성생명을 간사로 확정한 직후인 지난 6월 18일, 한진그룹 4개사(대한항공·한진칼·아시아나항공·진에어)와 삼성금융네트웍스 5개사(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카드·삼성증권·삼성자산운용)는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에서 대규모 전략적 파트너십(MOU)을 체결했다.
이날 체결식에는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회장, 류경표 한진칼 대표이사 부회장, 송보영 아시아나항공 대표, 박병률 진에어 대표와 홍원학 삼성생명 사장, 이문화 삼성화재 사장, 박종문 삼성증권 사장, 김이태 삼성카드 사장, 김우석 삼성자산운용 대표 등 양 그룹 계열사 대표이사가 대거 참석했다.
이 협약을 통해 양측은 자회사 제휴카드 출시부터 항공·운송 전용 보험 프로그램 개발, 핀테크·AI·디지털 자산 연계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그룹 차원의 포괄적 신사업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삼성금융 측은 항공·금융이라는 이종 산업 간 결합을 통해 이용자들에게 차별화된 혜택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2조2000억원대 퇴직연금 대표 간사' 지위가 양 그룹 간 협력을 견인하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다는 시각도 나온다. 대한항공으로서도 특정 시중은행들의 소외감이나 반발에 대응해 '그룹 차원의 포괄적 신사업 동맹'이라는 명확한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평이다.
22개사 체제 '쪼개기 배분'…금리·여신 기여도 따라 차등 적용
이번에 선정된 22개 사업자는 DB(확정급여형)와 DC(확정기여형) 운용 자격을 모두 갖춘 체제로 파악됐다. 다만 적립금 운용은 당분간 DB형에 집중될 전망이다. 대한항공은 2조 원대에 달하는 확정급여채무를 수년에 걸쳐 사외로 나누어 적립하는 DB형을 우선 가동한 뒤, 향후 근로자 개인 희망에 따라 22개 사업자 중 선택해 DC형으로 전환할 수 있는 '단계적 혼합 트랙'을 채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553조8천700억원으로 전 분기 대비 8.9% 늘었을 만큼, 시장 자체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는 시장에서 무려 22개에 달하는 금융사를 사업자로 발탁한 것 역시 수많은 금융기관과의 네트워크를 유연하게 보존하고 자산 운용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다만 22개사에 균등하게 자금을 배분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한항공은 향후 각 금융사가 제시하는 원리금 보장 금리 수준, 자산운용 성과, 차입금 등 여신 기여도 및 거래 관계를 다각도로 평가해 2조2천억원대 적립금을 차등 지급하는 '쪼개기 배분' 방식을 채택할 방침이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여신 기여도, 수익률 등이 상대적으로 낮은 일부 사업자의 경우 실제 이전 금액이 100억~200억원 수준에 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교한 안배 속 퇴직연금 전환 본격화…통합 앞둔 상생형 중재안 평가
금융권 퇴직연금 관계자는 "통합 대한항공 출범을 앞두고 대규모 자금 이동에 따른 잡음을 차단하면서도 금융사와의 관계를 두루 배려한 상생형 중재안"이라며 "대표 간사인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적립금 사외 이전 및 행정 절차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가운데 최근 대한항공 노사가 임단협을 타결하는 등 협력 기조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만큼, 향후 조합원 동의 절차 역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12월 17일 통합 대한항공 출범과 정부의 단계적 퇴직연금 의무화 로드맵이 맞물리면서, 이번 선정 결과는 대형 항공사의 제도 전환뿐 아니라 항공·금융 이종산업 간 결합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사례로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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