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리금 보장 상품에만 안주하며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한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의 한계를 극복하고, 수탁법인이라는 전문적 지배구조를 통해 근로자의 노후 자산을 체계적으로 운용하겠다는 의지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선언문 이면에는 제도의 실효성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는 조항이 숨어 있다. 바로 “기금형 퇴직연금은 DC형(확정기여형)에만 적용한다”는 원칙이다. 이 규정은 공동선언문이 야심 차게 제시한 세 가지 기금형 모델 중 하나인 ‘연합형 기금’의 존립 근거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모순을 낳을 수 있다.
1. ‘DC형 전용’ 연합형 기금이 가진 구조적 모순과 유인 불합치
공동 선언문에는 연합형 기금을 “복수의 특정 사용자가 연합해 별도의 공동 수탁법인을 설립하고, 소속 근로자의 퇴직연금 적립금을 기금화해 운영하는 형태”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연합형 기금 수탁법인 이사회에는 노사가 동수로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다. DC형 퇴직연금의 본질은 ‘투자 위험의 근로자 귀속’과 ‘사용자 책임의 종결’이다. 사용자는 매년 정해진 부담금을 근로자의 개인 계좌에 납입하는 순간, 퇴직급여와 관련된 모든 재무적·법적 의무에서 벗어난다. 이후 적립금의 운용 성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전적으로 근로자 개인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용자의 자산운용에 대한 재무적 위험이 전혀 없는 DC형 제도를 위해, 복수의 사용자들이 굳이 비용과 시간을 들여 ‘공동 수탁법인’을 설립하고, ‘노사 동수 이사회’에 참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참여할 이유가 없을 이유를 설명하자면 첫째, 유인의 부재(Incentive Mismatch)다. 사용자가 연합형 기금에 참여하려면 수탁법인 설립 분담금, 운영 경비, 이사회 참석에 따른 행정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둘째, 지배구조의 공동화(Empty Governance)다. 노사 동수 이사회는 매우 강력한 의사결정 기구이다. 하지만 다루는 자산이 DC형 적립금뿐이라면, 이사회는 개별 근로자의 자산 배분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수준의 형식적인 역할에 그치게 된다. 사용자는 책임이 없으므로 이사회 운영에 방관자로 일관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결국 지배구조의 공동화와 전문성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2. 호주 인더스트리 수퍼와 글로벌 사례가 주는 교훈
1) 단체협약(Award)과의 연계: 호주의 인더스트리 수퍼는 1980년대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 간의 강력한 산업별 단체협약을 통해 도입됐다. 즉,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닌 산업 전체의 의무적 합의에 기반했기 때문에 사용자의 자발적 참여 유인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2) 디폴트 기금(MySuper) 규모의 경제: 호주는 법적으로 지정된 디폴트 상품(MySuper)을 통해 대규모 자금을 일괄 유입했다. 이를 통해 기금은 초기에 엄청난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고, 인프라, 부동산, 사모펀드 등 장기 고수익 자산에 직접 투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
3) 한국과의 차이: 한국은 산업별 단체협약 영향력이 매우 약하며, 퇴직연금 가입 및 상품 선택이 개별 기업과 근로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제도적 토양에서 호주식의 강제적 유입 장치 없이 ‘DC형 연합형 기금’을 던져 놓는다면, 어느 기업도 자발적으로 연합 수탁법인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3. 네덜란드의 산업별 연합 기금(ABP, PFZW 등)과 하이브리드 모델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퇴직연금 제도를 가진 국가로 손꼽힌다. 네덜란드의 기금형 퇴직연금은 대부분 복수의 사용자가 참여하는 산업별 기금이다.
1) DB형 및 집합형 DC(Collective DC) 중심: 네덜란드 연합 기금의 핵심은 ‘위험 공유(Risk Sharing)’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DB형이거나, DB와 DC의 장점을 결합한 집합형 DC(CDC) 모델을 운영한다.
2) 사용자의 참여 유인: DB형이나 하이브리드형 모델에서는 적립금 운용성과가 사용자의 추가 기여금 납입 의무(Funding Ratio)와 직결된다. 따라서 사용자는 기금의 운용 효율성을 높이고 투자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합 기금 설립에 동참하고, 이사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낸다. 즉, ‘재무적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배구조 참여’라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4. 미국의 타프트-하틀리 기금(Taft-Hartley Plans)
미국의 다수 사용자 퇴직연금(Multi-employer Plans)인 타프트-하틀리 기금 역시 건설, 운송 등 이직이 잦은 업종의 복수 사용자들이 연합해 운영하는 DB형 기금이다. 근로자가 동일 산업 내에서 직장을 옮기더라도 퇴직급여가 단절 없이 통산되도록 하기 위해 설계됐다.
이 모델 역시 사용자가 퇴직급여 지급 채무를 공동으로 분담하기 때문에, 기금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지배구조에 참여한다.
5. 연합형 기금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해외 사례가 보여주는 일관된 진리는 하나다. 복수 사용자가 참여하는 연합형 기금이 성공하려면, 사용자가 기금운영의 성과에 대해 재무적 이해관계를 가져야 하며, 기금이 자산의 ‘풀링(Pooling, 공동 수탁)’을 통해 실질적인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금형 대상에 DB를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금형 퇴직연금을 오직 DC형에만 가두어 두는 것은, 수영장을 만들어 놓고 물은 채우지 않은 채 수영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특히 복수 사용자의 연대와 협력을 전제로 하는 ‘연합형 기금’은 DC형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는 결코 싹을 틔울 수 없다. 사용자의 재무적 책임과 유인이 배제된 지배구조는 형식적인 서류 작업과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글로벌 표준(Global Standard)은 이미 우리에게 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제도적 빗장을 풀어야 할 때다. 반쪽짜리 타협에 그치지 않고, 100년 대계를 내다보는 대담한 제도 설계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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