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여러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금융기관 개방형’ 기금형 제도는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가입자의 수익률을 제고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로 가득하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략적 게임이 펼쳐질 준비를 하고 있다. 핵심은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인 대형 금융그룹들이 기존의 ‘계약형’ 퇴직연금 사업과 새로운 ‘기금형’ 수탁법인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A금융그룹이 운영하는 계약형 상품의 가입자가 A금융그룹이 대주주인 기금형 수탁법인으로 이동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 이는 자기잠식(Cannibalization)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그룹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통제된 전환(Controlled Cannibalization)’ 전략이다. 그룹의 입장에서 가입자의 이동은 ‘고객 이탈’이 아니라 ‘계열사 내 포트폴리오 재배치’에 불과하다. 의사결정의 핵심 기준은 단 하나, ‘어느 쪽이 그룹에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계약형 사업의 수익 원천은 운용 및 자산관리 수수료에 국한된다. 반면, 기금형 수탁법인은 기본 수수료에 더해 우수한 운용성과에 기반한 ‘성과보수’까지 수취할 수 있는 구조다. 이는 실력 있는 자산운용 역량을 갖춘 금융그룹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인이다. 결국, 이들의 경영 의사결정은 자연스럽게 기금형 수탁법인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수밖에 없다.
본 칼럼에서는 이러한 전제하에, 대형 금융그룹들이 어떻게 의도적으로 계약형 시장을 흔들고 새로운 시장 질서를 구축해 나갈 것인지 3가지 시나리오를 통해 예측하고자 한다.
새로운 핵심 메커니즘, ‘통제된 전환’ 전략
대주주가 동일한 구조에서 시장은 더 이상 순수한 자유 경쟁의 장이 아니다. 대신, 시장 지배력을 가진 소수의 플레이어가 주도하는 ‘통제된 시장 재편’의 무대가 된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외부 경쟁사에 고객을 뺏기지 않으면서, 그룹 내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고 미래 성장성이 큰 기금형 상품으로 가입자 자산을 옮겨 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정교한 전략이 구사될 것이다.
둘째, 유도 경로(Guided Path) 설계: 기존 계약형 고객 DB를 활용해 타겟 고객을 선별하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그룹 내 기금형 수탁법인으로 이동하도록 PB 상담, 앱 푸시, 맞춤형 콘텐츠 등 모든 채널을 동원한 경로를 설계한다.
셋째, 브랜드 포지셔닝 차별화: 계약형은 ‘안정성’과 ‘기본’을 강조하는 상품으로, 기금형은 ‘전문가에 의한 성과 중심’의 프리미엄 서비스로 역할을 명확히 분담해 고객의 선택을 유도한다.
이처럼 시장은 자연 발생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쥔 플레이어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격렬하게’ 흔들릴 것이다. 그 충격은 운용 성과가 부진하고, 변화에 대비하지 못한 중소형 금융사와 기존 계약형 사업자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금융그룹 주도의 시장 재편 3가지 시나리오
금융그룹들은 시장 상황과 자신들의 경쟁 우위에 따라 각기 다른 강도의 전략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나리오 1: 보수적 접근(Internal Migration) – ‘내부 고객 중심의 점진적 이동’. 이 전략은 외부의 소음을 최소화하며 알짜 고객을 내부적으로 이동시키는, 마치 ‘조용한 이사’와 같다. 대대적인 TV 광고나 외부 캠페인 대신, 기존 계약형 가입자 DB를 활용한 내부 마케팅에 집중한다.
고액 자산가나 수익률에 민감한 DC/IRP 가입자 등 이탈 가능성이 높은 우량 고객을 타겟으로 PB들이 “우수 고객님께만 먼저 제안하는 새로운 전문가 서비스”와 같은 프레임으로 접근한다. 외부에는 전환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하고 점진적으로 유도한다.
시나리오 2: 기준 제시(Market Reshuffling) – ‘의도적으로 판을 흔들어 경쟁사를 고사시키는 전략’. 이 전략은 시장에 새로운 ‘성과의 기준’을 제시하며, 준비되지 않은 경쟁자들을 의도적으로 도태시키는 방식이다. “당신의 퇴직연금, 아직도 방치하십니까?”, “수익률로 증명하지 못하는 과거의 방식에 머무르시겠습니까?”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로 시장 전체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가입자들이 자신의 수익률을 돌아보게 만든다.
계약형 채널은 안정성을 중시하는 고객을, 신규 수탁법인은 성과를 중시하는 고객을 타겟으로 역할을 명확히 분담하고, 그룹 내 전환 고객에게는 수수료 할인 등의 명확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시나리오 3: 공격적 재정의(Category Redefinition) – ‘계약형을 구시대 유물로, 기금형을 새로운 표준으로’. 가장 공격적인 이 전략은 계약형 시장 자체를 과거의 유물로 만들고, 기금형을 퇴직연금의 ‘새로운 표준(New Normal)’으로 재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계약형은 손해”라는 메시지를 넘어, “선진국형 전문가 기금 제도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는 프레임으로 기금형 제도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TV 광고, 유튜브, 언론 기사, PB 교육 등 그룹의 모든 채널을 총동원해 신규 수탁법인을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홍보한다. 나아가 기업 고객(B2B)을 대상으로 디폴트옵션을 자사 기금형 상품과 연계하도록 적극 유도하며 개인뿐 아니라 집단적 이동까지 설계한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도입은 가입자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대형 금융그룹이 계약형과 기금형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는 구조하에서, 시장은 우리가 기대하는 공정한 경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은 ‘통제된 혼돈’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이 ‘통제된 혼돈’의 최종 승자는 명확해 보인다. 바로 우수한 운용 역량을 바탕으로 기금형 수탁법인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이 과정에서 경쟁사의 고객까지 흡수하는 소수의 대형 금융그룹이다. 이들은 혼돈을 통해 외부 경쟁자를 제거하고, 자사 고객을 내부적으로 재배치하며, 결과적으로는 전체 퇴직연금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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