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문제 삼은 것은 역삼 센터필드, 마곡 원그로브 등 대형 자산을 담고 있는 6개 펀드의 정보가 사전 동의 없이 잠재적 인수자들에게 제공된 사실이었다. 이들 대형 펀드는 국민연금의 사전 동의 없이 정보를 공유할 수 없도록 계약에 명시돼 있었다.
업계 관계자는 "원매자들에게 공유된 보고서에는 펀드 설정액과 평가액, 자산 관련 이슈 등 민감한 정보가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부 인수 후보자에게 이지스운용이 국민연금으로부터 받을 성과보수 전망까지 전달됐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이를 중대 사안으로 판단하고 민·형사상 법적 조치까지 검토 중이다.
국민연금은 또 이지스가 중국계 사모펀드 힐하우스를 우협으로 선정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당초 선택지에 없던 외국계가 어떤 경위로 부상했는지 설명을 요구하며 사전 정보 공유 부재를 항의했다.
2조가 빠지면, 매각도 무산된다
국민연금의 결정은 이지스자산운용 매각에 치명타다. 이지스의 부동산펀드 설정액은 약 26조 2000억원이며, 국민연금이 출자한 금액은 2조원 수준이지만 시장 평가액으로는 7조~8조원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이지스의 실질 운용 기반 대부분이 국민연금 자산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작지 않을 것으로 본다.
출자금이 빠지면 전체 운용자산(AUM)이 크게 줄어 회사 가치도 대폭 낮아진다. 힐하우스와의 거래 조건 재협상은 물론, 최악의 경우 매각 무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연금은 향후 자산을 코람코자산신탁, 삼성SRA, KB자산운용 등 기존 거래 중인 7개 운용사에 분산 이관할 방침이다.
흥국생명의 법적 공세, "프로그레시브 딜은 술책"
흥국생명은 본입찰에서 약 1조 500억원으로 최고가를 제시했다. 한화생명은 9000억원대 중반을 썼다. 매각 주관사는 본입찰 전 프로그레시브 딜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흥국생명은 이를 믿고 최고액을 제시했다.
하지만 본입찰 직후 주관사가 갑자기 프로그레시브 딜을 진행하겠다고 통보했고, 힐하우스에게만 추가 입찰 기회가 주어졌다. 힐하우스는 인수가를 1조 1000억원까지 끌어올렸고 우협으로 선정됐다.
'중국계' 꼬리표, 금융당국 심사가 마지막 관문
힐하우스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사실상 중국계 자본으로 분류된다. 중국 출신 기업가 장레이가 2005년 설립했으며, 텐센트와 징둥닷컴 등 중국 빅테크 초기 투자로 성장했다.
이지스는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행정공제회 등 국내 연기금이 약 6조원가량 투자한 회사다. 민간 상업시설뿐 아니라 물류센터, 데이터센터, SOC 등 공공성 높은 자산을 운용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힐하우스가 금융당국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단순한 운용사 매각이 아니라 국민 노후자금 관리인을 바꾸는 문제"라며 "해외 사모펀드가 경영권을 잡으면 단기 수익에 치중해 안정적 운용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힐하우스는 10일 입장문을 내고 "모든 절차에서 매각 주관사의 기준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며 "단기적 수익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중시하는 투자자로서 장기적 관점에서 이지스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은 10일 사모펀드의 과도한 차입 매수를 규제하고 외국 자본의 국가 핵심기술 보유 기업 인수합병을 제한하는 자본시장법과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국토교통부 차관 출신 고(故) 김대영 창업주가 2010년 설립해 누적 운용자산 66조 8000억원 규모의 국내 1위 자산운용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 창업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최대 출자자인 국민연금이 등을 돌렸고, 인수전 경쟁자는 법정 공방을 예고했으며, 금융당국의 심사라는 높은 벽이 남아 있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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