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검색

epic-Column

[김병철 칼럼⑧]500조원 노후 자산, 누가 어떻게 굴릴 것인가

'운영'과 '운용'의 분리, 전문가 역할 분담의 비밀

2025-12-05 13:22:15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이미지 확대보기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기금형 퇴직연금이야말로 근로자들에게 '최적의 전문가를 선택할 권한'을 보장하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이다. 이제 노후 자산을 불려나갈 500조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할 주체가 정해졌다면, 이 소중한 자산을 실제로 어떻게 운용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성공적인 기금형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마치 초대형 연금 운반선을 항해하는 것과 같다. 이 배는 20~30년이라는 장기 항해를 통해 가입자를 노후라는 안전한 항구로 데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항해를 성공시키기 위한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함장의 책임(운영)과 조타수의 전문적인 실행(운용)을 명확히 분리해서 그 시스템을 구현하는 것이다.
함장의 역할, 항해의 큰 그림을 그리는 책임자

기금을 조성하고 근로자의 이익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지는 운영 주체, 즉 수탁자는 운반선의 함장과 같다. 이들은 실제 키를 잡고 배를 모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의 역할은 오직 승객, 곧 가입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 항해의 큰 그림을 그리고 전문가 팀을 엄격하게 감독하는 것이다.

함장의 첫 번째 임무는 방향 설정이다. 기금의 목표수익률은 얼마로 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위험까지 허용할 것인가 등 장기적인 투자 목표를 결정한다. 두 번째 임무는 전문가 선정 및 감시다. 누가 실제로 자산을 운용할지 최고의 전문 운용사를 선정하고, 그 성과를 정기적으로 평가하며 감시한다.
함장은 "나는 금융 지식이 부족한 근로자들을 대신해, 최고의 전문가에게 노후 자산의 운용을 위임한다"는 권한을 행사한다. 동시에 기금이 오직 가입자의 장기적인 이익만을 대변하도록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한다.

조타수의 역할, 전문성을 실현하는 실행자

운영 주체가 방향을 설정하면, 운용 주체인 퇴직연금기금전문운용사는 이 목표를 바탕으로 자산을 실제로 투자하고 집행하는 조타수 및 엔지니어의 역할을 맡는다. 이들이 바로 장기 투자 철학과 규모의 경제라는 기금형의 고수익 원리를 실현하는 실행 전문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운용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운용 주체는 단순한 금융사가 아니라 자본시장법 제8조 4항에 따른 집합투자업자가 담당하도록 법적으로 강제된다. 왜 이렇게 까다로운 법적 지위를 요구할까?

이를 집 짓는 과정에 비유해 보자.
최 씨는 평생 살 집, 즉 노후 자산을 짓기 위해 건축회사를 선택했다. 이 건축회사가 바로 A 기금이며, 운영 주체다. 최 씨는 건축회사에게 "튼튼하고 오래갈 집을 지어라"는 목표와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해라"는 위험 한도를 전달했다. 건축회사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건설 기술자 중에서 국가 공인된 건축구조 전문가, 즉 집합운용사를 고용한다.

이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는 무엇일까? 바로 독립성과 충실의무다. 이 공인된 건축구조 전문가는 건축회사의 압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오직 최 씨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신중하게 설계를 진행해야 할 법적인 의무를 갖는다. 만약 건축회사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저렴한 자재를 쓰거나, 계열사 채권 등 사적인 이해관계에 투자하도록 압력을 가해도, 이 공인 전문가는 법적 책임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운영과 운용의 분리가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다.

여기에 더해 투명성과 감시라는 최후의 안전망이 작동한다. 이 공인 전문가는 자본시장법의 엄격한 규제를 준수해야 하므로, 모든 설계 과정과 자금 집행 내역은 금융감독원 등 전문 감독 기관의 감독과 감시를 받는다. 이는 최 씨가 모르는 사이 설계가 변질되거나 부실해지는 것을 막는 최후의 안전망이다.

근로자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무기, 기금 교체

그렇다면 만약 건축회사의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 씨가 직접 회사에 들어가 "내가 고용한 구조 전문가 팀을 바꾸겠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회사의 복잡한 내부 사정에 관여하게 되어 혼란만 커질 것이다.

기금형 제도는 근로자를 이러한 불필요한 복잡성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선택을 단순화한 것이다. 기금형 제도는 근로자들에게 복수의 기금 중에서 가장 높은 성과와 투명성을 제공하는 기금을 선택하고 교체할 권한을 부여했다.

근로자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견제는 복잡한 기금 내부 운용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성과가 미흡한 A 기금 자체를 성과가 우수한 B 기금으로 통째로 옮겨가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따라서 기금형 제도는 근로자들에게 '운용사 교체' 권한을 주는 대신, '기금 자체를 교체'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집중시켜 노후 자산 관리의 복잡성을 최소화한다. 이는 근로자들이 과거 계약형 제도의 '선택의 함정'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시스템이다.

한국형 기금형 퇴직연금은 함장과 조타수의 역할을 분리하고, 조타수에게 법적 책임을 강화함으로써 근로자들의 노후 운반선이 목표 항구까지 안전하고 전문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함장, 즉 수탁자가 어떻게 기업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막중한 책임을 이행하고 감독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책임은 단순히 개인의 양심에 맡겨서는 안된다.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보장하는 제도적 위원회 구조를 통해 실질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다음 9편에서는 이 수탁자 책임의 핵심 철학인 위원회 구조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어 보겠다. 500조 원의 노후 자산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 바로 위원회 구조의 설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리스트바로가기

Pension Economy

epic-Who

epic-Company

epic-Money

epic-Life

epic-Highlight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