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처음 이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반대가 적지 않았다. “생산성에 비례해서 급여를 줘야지, 나이로 월급을 주면 누가 열심히 하겠느냐”는 걱정이 회사 안팎에서 동시에 나왔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조직이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이, 덜 일한 사람에게는 덜 준다”는 원칙을 정의의 언어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여러 회사를 거치며 실제로 본 풍경은 이 상식과 꽤 달랐다. 성과와 보상을 촘촘히 연결할수록, 직원들이 점점 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협업 도구 슬랙(Slack)의 ‘State of Work’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 사무직 근로자들은 근로시간의 약 3분의 1을 회사와 팀의 목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바쁘게 보이기 위해 하는 일”, 이른바 ‘퍼포머티브 워크(performative work)’에 쓰고 있다고 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의 참석,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기 어려운 보고서, 메신저 창의 초록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업무 시간 내내 자리를 지키는 눈치 보기 같은 것들이다. 다른 조사에서는 퇴근 후에도 상시 대기하는 직원일수록 오히려 생산성 지표는 낮고 번아웃과 스트레스는 더 높다는 결과도 나온다.
“늘 접속해 있는 사람”과 “일을 잘하는 사람”이 다른 존재라는 뜻이다. 사장이 진짜로 원하는 사람은 야근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도, 메신저에 항상 “온라인”으로 떠 있는 사람도 아닐 것이다. 결국 조직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일’이 아니라 ‘일하는 척’에 쏟을까.
경제학은 여기서 ‘확실성 등가(certainty equivalent)’라는 개념을 꺼내 든다. 말은 어렵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이번 달 월급이 300만 원으로 확실히 보장되는 직장과, 이번 달 월급이 0원일 수도 있고 600만 원일 수도 있는 직장을 떠올려 보자. 종이 위 숫자만 보면 둘의 기대값은 똑같이 300만 원이다. 하지만 실제로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라면 대부분은 전자를 선택한다. 사람은 대체로 위험을 싫어하고, 같은 평균 소득이라도 덜 흔들리는 쪽을 더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경제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복불복 월급 대신 확실한 월급으로 바꿔 준다면, 얼마까지 떨어져도 두 선택을 비슷하게 느끼겠느냐.” 많은 사람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꼭 300만 원까지는 필요 없고, 260만 원이라도 확실하다면 그게 낫겠다”에 가깝다. 이때의 260만 원이 그 사람에게서 불확실한 300만 원 월급이 지니는 ‘확실성 등가’다. 종이 위에서 300만 원으로 보이던 보상이 마음속에서는 “확실한 260만 원 정도의 가치”로 깎여 버리는 셈이다. 위험을 싫어할수록, 같은 노력을 끌어내기 위해 불확실한 보상에는 더 큰 “당근”이 필요해진다.
성과급과 인센티브 제도는 표면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더 열심히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하지만 확실성 등가의 언어로 번역해 보면 구조는 조금 달라진다. “당신의 생계와 미래를 회사 실적, 상사의 평가, 시장 상황 같은 확률 게임에 묶겠다.” 오늘 죽어라 일해도, 내 보너스는 경기와 정치,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출렁일 수 있다. 직원 머릿속에서 보상은 하나의 ‘확률 변수’가 된다. 그 결과 사람은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하나는 모든 스트레스를 감수하고 “진짜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리스크는 최소화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기술”을 연마하는 길이다.
슬랙 보고서가 보여준 30%가 넘는 퍼포머티브 워크의 비중은, 우리가 실제로는 두 번째 길에 훨씬 더 익숙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위험을 개인에게만 떠넘긴 채 “더 큰 당근을 흔들면 된다”는 믿음은, 생각보다 자주 ‘눈치 보며 일하는 척’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하루가 끝나면 결과물을 있는 그대로 공유한다.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 어디까지 만들었는지, 어디에서 막혔는지만 기록해 두면 된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웠는지”가 아니라 “오늘 무엇을 시도했는지”다. 이 구조에서는 급여를 지키기 위해 조직 안에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선택을 할 이유가 거의 없다.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회의 발언을 억지로 늘리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야근 사진을 올리고, 메신저 초록불을 끄지 못해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도 줄어든다. 어차피 내년 급여는 생일과 함께 오르게 돼 있다. 월급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 “상사의 평가와 조직 정치”에서 “내가 오늘 만들고 싶은 무엇”으로 옮겨간다.
이런 구조가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만능열쇠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적어도 하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확실한 바닥”을 깔아줬을 때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게을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를 믿어줬으니, 그 신뢰에 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생계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면, 사람은 “오늘 이 일을 잘 해냈을 때 내가 느끼는 자부심” 같은 내적 보상에 더 민감해진다. 기댓값을 키우겠다며 복잡한 인센티브를 덧붙였을 때보다, 확실한 급여와 간단한 약속만 남겼을 때 오히려 “진짜 일”에 더 많은 에너지가 배분되는 모습을 본다.
취업 준비를 하다가 “이 정도 연봉과 근무조건이라면 차라리 취업을 포기하겠다”며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청년들도 비슷한 구조 위에 서 있다.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람은 ‘장기적인 경력 설계’보다 ‘이번 달 카드값과 월세’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은 장기적인 꿈을 가장 먼저 할인시킨다.
같은 원리를 사회 전체의 소득 제도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 기본소득은 그 질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확실한 소득의 바닥이 깔리면 사람은 게을러질까, 아니면 더 멀리 뛸 수 있을까.
확실성 등가가 알려주는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같은 돈이라도, 불안하게 줄 때보다 확실하게 줄 때 사람들은 더 건강하게, 더 생산적으로 산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채찍이 아니라, 조금 더 단단한 바닥인지도 모른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를 “이념 싸움”이 아니라 “효용과 생산성의 문제”로 다시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한샘 알케미랩 대표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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