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현대의 연금제도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사회안전망이 존재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환곡(還穀)'이다.
춘궁기를 넘기는 생명줄, 환곡
환곡은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도록 한 제도다. 관리들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매년 곡물을 모아두었다가 굶주림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필요할 때 이를 환원하는 시스템이었다.
현대의 연금제도와 비교해볼 때 환곡은 여러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사회안전망의 역할이다. 환곡은 조선시대 지역 사회의 안전망 역할을 했으며, 주민들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현대의 연금제도 역시 사회 구성원들이 노후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안전망의 하나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둘째, 자발적 또는 의무적 기여다. 환곡은 주로 지방 관리나 지역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또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곡물을 적립했다. 비슷하게 현대의 연금제도에서는 근로자, 고용주, 정부가 자금을 적립하며 이는 노후를 대비하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
셋째, 위기 시의 지원이다. 환곡은 주로 자연재해나 기근 등 위급 상황에서 활용되어 지역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연금제도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나 개인의 건강 문제 등이 발생했을 때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여 개인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치면 환곡의 이자는 꽤 높은 편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20%(연리로 40%)였고, 조선 후기에는 6개월에 10%(연리로 20%)였다. 하지만 이 당시 사채 이자가 연 50%는 기본이고 100%를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왕실 직속 재산관리기관인 내수사에서 빌리는 대출의 금리가 시중 사채보다 훨씬 쌌음에도 30%였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한 서민금융제도였다. 물론 목적이 목적인 만큼 진짜로 심각한 기근이 터졌을 때는 이자가 면제되었다.
세계적 수준의 비축량, 튼튼한 사회안전망
만기요람 등을 보면 조선의 환곡 비축량은 18세기 후반 1천만 석에 달했다. 쌀로 환산하면 600만 석에 달하는 양이다. 동시대 중국도 환곡제도를 운용했는데, 중국이 비축한 식량은 쌀로 환산하면 2,300만 석으로 조선의 비축미 600만석의 4배에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얼핏 중국이 많아 보이지만, 인구 대비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 중국 인구가 2억명을 넘긴 데 비해 조선은 고작 1,500만명이었다. 인구 비례로 보면 조선의 1인당 곡물 비축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결과적으로 세도정치의 부패가 만연하기 이전 조선은 중국보다 사회안전망이 훨씬 튼튼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장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아예 환곡 제도가 없던 일본에 비해 조선은 세입의 상당량을 환곡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비축미로 돌렸기에 일본에 비해 국가 경제가 활발하지 않았다. 국가가 휘청일 만큼 큰 비용을 환곡 제도에 쏟아부은 탓이다. 그러나 그 덕에 전근대임에도 불구하고 비축미로 해결이 안 되는 대기근이나 큰 전쟁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당대의 타 국가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고보면 환곡은 단순히 곡물을 빌려주고 갚는 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사회가 백성들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얼마나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제도다.
물론 현대의 연금제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환곡이 가진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역할과 철학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500년 전 조선의 복지 시스템이 현대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을.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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