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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선의'의 탈을 쓴 위험한 도박

2025-09-02 10:20:07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 경영학박사. 이미지 확대보기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 경영학박사.
[글로벌에픽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선한 의도로 포장된 길이 지옥으로 이어진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현재 국회 일각에서 추진 중인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 주장을 마주할 때, 이 오랜 격언만큼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말은 없을 것이다.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의 핵심 내용인 "근로자가 모은 자산을 공공 영역에서 전문적으로 운용해 공공의 이익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들으면 국민의 노후를 걱정하는 숭고한 선의(善意)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수사의 포장을 한 꺼풀 벗겨내면, 제도의 법적 본질을 왜곡하고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며,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발상이 도사리고 있다.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은 저수익률의 늪에 빠진 퇴직연금 시장의 ‘구원투수’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를 지닌 ‘트로이의 목마’에 가깝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은 그 구조적 설계 자체가 대한민국 헌법이 수호하는 개인의 기본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는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최상위 규범인 헌법 정신을 위배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헌법 제23조는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고 천명한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부조가 아니라, 근로의 대가로 기업이 적립해 준 명백한 근로자 개인의 ‘사적 재산’이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법적 사실이다.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은 이 신성한 개인의 재산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다. 따라서 위헌 소지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제도 시행 시 수많은 헌법소원을 야기하여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필연적 운명을 안고 있다. 이는 정권차원에서도 매우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는 핵심 기본권이 바로 ‘자기결정권’이다. 자신의 노후 자산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는 개인의 생애 설계, 위험 감수 성향,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고도의 자기결정 영역이다. 20대 사회초년생은 공격적인 주식형 포트폴리오를, 40대 가장은 안정적인 채권혼합형 포트폴리오를, 은퇴를 앞둔 50대는 원금 보존을 최우선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합리적 개인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은 이러한 개인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거대 기금의 ‘획일적(one-size-fits-all)’ 운용 전략에 개인의 자산을 종속시킨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하여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관료적 온정주의(bureaucratic paternalism)’의 전형이다. 국민을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발상과 맞닿아 있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정신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셋째, 헌법 제119조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자유로운 경쟁과 소비자의 선택권은 이 원리의 심장이다.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은 이 심장을 멈추게 하는 행위다. 거대 기금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면, 수십 개의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경쟁의 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사업자 간의 수수료 인하 경쟁, 혁신적인 상품 개발 경쟁, 서비스 품질 개선 경쟁은 모두 소멸한다. 가입자는 획일적인 상품과 관료적인 서비스만을 강요받게 된다. 이는 헌법이 천명한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넷째,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은 세계연금 개혁 선행 국가들의 접근 정반대되는 발상이다. 전 세계 연금개혁의 역사는 ‘공적 영역의 축소와 사적 영역의 확대’로 요약된다. 1981년 칠레의 공적연금 민영화 이래, 영국, 호주, 스웨덴 등 수많은 선진국들은 공적연금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개인의 책임과 선택을 강화하기 위해 사적연금 시장을 육성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왔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유독 대한민국만이 ‘사적연금 시장에 공적 주체를 신설’하자는 기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이다. 왜 다른 모든 나라가 가지 않는 길을 우리만 가야 하는가? 이는 세계적 표준을 무시한 위험한 고립주의일 뿐이다.

다섯째, 또 하나의 ‘공룡 기금’ 탄생이라는 재앙이 될 수 있다. 경쟁이 사라진 독점 구조는 필연적으로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 조직을 낳는다. 우리는 이미 국민연금이라는 거대 ‘공룡 기금’을 통해 그 한계를 경험했다. 세계 3대 연기금이라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수익률은 세계 대형 연기금 중 최하위권이며, 경직된 조직 문화와 정치적 외풍에 대한 취약성은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퇴직연금 시장에 또 하나의 ‘공룡 기금’을 만드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복제일 뿐이다. 안일한 운용, 도덕적 해이, 관료주의적 경직성이라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답습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다만, 신설될 퇴직연금공단이 퇴직연금제도의 관리ㆍ감독 업무 지원, 퇴직연금사업자 관리 업무 지원,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운용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제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생기기 마련이므로 이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것은 진일보한 제도 발전일 수 있다. 이에는 퇴직연금공단 산하에 퇴직연금제도ㆍ재정계산ㆍ기금운용에 관한 조사연구, 퇴직연금제도에 관한 국제협력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퇴직연금연구원을 둘 수 있도록 하는 갓도 포함될 수 있다.

‘월든(Walden)’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최고의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다.”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governs least.)”라고 한 바 있다. 공공이익 환원 퇴직연금공단 설립 주장은 국민의 노후를 위한다는 선의를 표방하지만, 그 실체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고, 시장 질서를 파괴하며, 거대한 비효율을 낳는 위험한 도박일 수 있다. 진정한 해법은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걷어내고, 시장이 스스로 숨 쉬고 경쟁하게 만들어야 한다. 가입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부여하고, 민간 금융기관들이 ‘성과’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저수익률의 늪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다.

[글로벌에픽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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