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이 미국발 관세 위기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양사는 21일 서울 강남구 현대차 사옥에서 '철강 및 이차전지 분야의 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자리에는 이주태 포스코홀딩스 미래전략본부장(사장)과 한석원 현대자동차그룹 기획조정본부장(부사장) 등 양사 경영진이 참석해 협력 의지를 다졌다.
이번 협약의 핵심은 현대차그룹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건설 예정인 전기로 제철소에 포스코그룹이 전략적 투자자(SI)로 참여하는 것이다. 현대제철은 앞서 총 58억 달러(약 8조5000억원)를 투입해 연간 270만 톤 규모의 자동차 강판 특화 전기로 일관제철소 건설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 대형 프로젝트의 투자 부담을 나누기 위해 외부 투자 유치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발표 한 달 만에 포스코그룹이 투자자로 확정되었다. 구체적인 투자 규모와 지분율은 추후 협상을 통해 확정될 예정이며, 포스코가 일부 생산 물량을 직접 판매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이 제철소를 통해 자사의 미국 내 생산 거점인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와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기아 조지아 공장 등에 고품질 자동차 강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계획이다. 또한 최근 현대차그룹은 2028년까지 210억 달러(약 31조 원) 규모의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미국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 구축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포스코그룹 입장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보호무역장벽으로 제한되었던 북미 철강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현재 포스코의 미국 현지 철강 사업 핵심 거점은 POSCO America Alabama Processing Center(POSCO-AAPC)로, 연간 약 12만 톤의 자동차 및 전기강판을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대·기아차가 주요 고객사다. 2020년에는 미국 US 스틸과의 합작사인 USS-POSCO Industries(UPI) 지분을 매각한 이후 단독으로 현지 사업을 추진해왔으나, 미국의 철강 수입품에 대한 25% 관세 부과 결정으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번 협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지난달 12일부터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 25%와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한국은 2018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적용됐던 연간 263만 톤 무관세 혜택이 폐지된 상황이다. 이는 국내 철강업계 1·2위가 미국 트럼프 정부의 철강 품목 관세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첫 사례로서 의미가 크다.
양사의 관계는 과거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전략적 협력 관계로 변화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현대차가 철강업에 뛰어들 때부터 포스코와는 견제와 경쟁을 지속해온 '라이벌 관계'였다. 20여 년 전에는 현대차가 철강 자체 조달 움직임을 본격화하자 포스코가 자동차 강판용 제품 공급을 거부하는 등 '원수'같은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통상 압박이라는 공동의 위기 앞에서 양사는 '파트너'로 변신해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재계에서는 "양사는 시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라이벌이면서도, 실리를 위해선 과감히 손을 잡을 만큼 '적과 동지'를 오가는 프레너미(frenemy·적과 친구의 합성어) 관계"라고 설명한다.
철강뿐만 아니라 양사는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세계적인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상황에서 안정적이고 다변화된 공급망 확보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포스코그룹은 리튬부터 양·음극재까지 이차전지 소재 사업에서의 경쟁력을, 현대차그룹은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기술력을 결합해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전략이다. 이차전지소재 기업 특성상 포스코퓨처엠이 아직 완성차 제조사(OEM)인 현대차 그룹과 직접 협력관계를 체결한 적은 없었으나, 전기차 시장 침체로 인한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협력 모델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번 미국 전기로 투자는 지난해 포스코와 인도 JSW그룹 일관제철소 합작 프로젝트와 유사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포스코는 2005년 인도 오디샤주에 120억 달러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가 현지 주민들의 반대로 2017년 무산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지난해 인도 1위 철강사인 JSW그룹과 협력하면서 현지 파트너십을 통한 해외 진출 전략으로 선회했다. 현대차그룹과의 JV 투자도 같은 맥락에서 통상 압박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과거에도 위기 상황에서 협력한 사례가 많다. 2015년 중국산 철강재 수입이 급증했을 때 건설기술관리법 개정과 반덤핑 제소를 함께 추진했고, 2021년에는 광양항과 평택·당진항 연안해운 인프라를 공유했다. 2022년에는 포스코케미칼이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1고로 신예화 작업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왔다. 장인화 포스코홀딩스 회장도 지난 1월 철강업계 신년 인사회에서 2018년 업계와 정부가 원팀을 이뤄 '대미 수입 쿼터제'를 끌어낸 사례를 언급하며 "철강업계가 하나 돼 보호무역주의 파고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포스코그룹 관계자는 "두 그룹은 지난 1973년부터 50년이 넘게 이어진 철강과 자동차라는 동반자적인 신뢰 관계의 연결고리로 철강과 자동차 산업에서 국내를 넘어 글로벌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주태 포스코홀딩스 사장은 "양사의 시너지를 바탕으로 글로벌 통상 압박과 패러다임 변화에 철강과 이차전지 소재 등 그룹 사업 전반에 걸쳐 지속 성장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그룹 역시 "이번 협약을 통해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서의 사업 기회를 확대하고,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서의 지속가능한 성장 및 전동화 리더십 확보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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