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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한끗차이] 웨민쥔의 웃음과 정청래 전 대표의 웃음, 그 사이

2026-07-01 10:45:24

[정보철의 한끗차이] 웨민쥔의 웃음과 정청래 전 대표의 웃음, 그 사이이미지 확대보기
[정보철 칼럼리스트] 가끔은 문득 생각한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웃지 않는 존재였으면 하고.

인간은 웃음을 발명했다.
현실이 어처구니없기에 웃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서다.
사회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객으로서 바라다보면, 어느새 많은 상황이 코미디가 되어버린다.

웃픈 그림 이야기는 한참 술잔을 기울이던 그 자리에서 나왔다. 우리는 사회의 공정성 문제로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그림이 있어요. 그 과장된 웃음 하나로 온갖 만감이 교차해요. 웃기면서도, 왠지 서글프기도 하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웨민쥔 작가의 작품 ‘처형’이 2007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590만 달러에 팔리며, 당시 중국 현대미술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중국 상하이 유학 중이었던 후배 기자는, 지도 교수 권유로 촉망받는 젊은 작가를 응원한다는 마음에서 작가의 그림을 단돈 27만 원에 구입했다. 작품 뒷면에 작가의 넘버링 ‘100’이 찍힌 뜻깊은 작품으로, 작가의 100번째 작품이라는 의미였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화가 ‘스텔라 김’ 조차도, 웨민쥔 작품을 현직 기자 손에 있다는 말을 처음엔 믿지 못할 정도였다.

며칠 전 나는 파주에 새로 문을 연 ‘마운풀리’ 카페를 찾았다. 4층 건물 1층 한쪽에서는 김종래 상무가 에릭스 도자기 전시장 공사를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인부 한 명과 목공 작업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김 상무의 삶은 ‘진정성’ 그 자체였다.
그와 에릭스의 이오훈 대표는 원래 그릇 판매하는 경쟁자였지만, 이 대표 제안으로 김 상무가 자신의 사업을 접고 에릭스에 합류했다. 그게 무려 30여년 전의 일로, 이후로 어떤 풍파에도 김 상무는 이 대표 곁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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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알아보고 씩 웃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 웃음은 정겹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감정이 묻어나는 어설픈 미소였다. 나는 순간 ‘웃는 얼굴 그림’이 떠올랐다. 웨민쥔 작품 속 그 웃음과 김 상무의 얼굴이 어느새 똑 닮아 보였다.

웨민쥔 인물들은 모두 바보처럼 과장되게 웃는다. 그 웃음에는 강요된 듯 부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다.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에 눈을 감고 과장된 동작을 하며 허튼 웃음을 짓는 남자,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이다. 그의 웃음은 현실을 비판하는 냉소다. 배반하는 현실을 조롱하고, 폭력적인 현실에 눈감는 자아의 웃음이다.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과 친구들의 냉소를 담아냈다. 그 작품들은 문화 혁명과 개혁 개방이 낳은 혼란과 공허, 슬픔과 분노를 강렬한 웃음으로 표현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이해하기 어렵고 황당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김 상무의 웃음 역시, 그가 맡은 에릭스 도자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외식업이 어려워지면서 도자기 사업도 고전하자, 그는 판로 개척을 위해 몸부림친다. 파주의 카페에서 자사 제품인 힐링요 전시장을 여는 것도 그 일환이다.

카페 2층 테라스에는 다양한 화초가 피어 있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띈 노란 꽃을 나는 성급히 수선화라 불렀다. 산후조리원을 운영하는 허윤민 대표는 갸우뚱하며 네이버 렌즈로 확인한 뒤 그것이 백합임을 알려 주었다. 꽃 가운데 수술대를 보니 백합이 맞았다.
‘하얀 백합이 아니라 노란 백합이라니’ 처음 보는 색이었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백합 특유의 진한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골짜기의 백합’이라는 소설과 ‘테스’라는 책이 떠올랐다. 전혀 다른 작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두 작품이 내 마음 안에서 겹쳐졌다.
허 대표에게 ‘골짜기의 백합’ 이야기를 하려다 멈추었다. 그 소설책을 안고 가슴 저미던 중2 시절의 기억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 ‘그렇게 순수하다’라는 생각에 며칠 동안 잠들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세상을 현실의 세상으로 착각하기 좋은 중2병이라 치부해도 좋다. 그 감정이 너무 생생히 스며들어 울컥, 마음이 흔들렸다.

아름다운 시골 전경에서 하얗게 피어난 ‘골짜기의 백합’을 보며 주인공 펠릭스는 모르소프 부인을 상상하는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테스 역시 시대와 운명 속에서 그 순수함을 지키려다 무너진다.
두 작품은 분명 감성과 상징으로 강하게 이어진다. 순수성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 실마리는 ‘테스’에서 나온 그 유명한 구절에 있을지 모른다.

"그건 다르오." (It is not the same.)
남자주인공 에인절이 테스의 고백을 듣고 한 말. 이 세 단어는 위선과 내로남불의 결정체로 공정성 훼손과 정의의 부재를 알리는 상징적 문장이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김 상무의 웃음에서 웨민쥔의 작품을 떠올리고, 카페 테라스에 핀 노란 백합을 보면서 ‘테스’와 ‘골짜기의 백합’을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다니. 이것은 바로 황금 풍뎅이에서 발견했다는 칼 융의 ‘동시성 원리’였다.
동시성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사건을 잇는 무의식의 메시지이다.
기감이 열린 사람은 무의식의 메시지를 자주 받는다. 나는 허 대표만큼 기감이 활짝 열린 이를 보지 못했다. 북한산 삼성암의 독성각에 들어갔었을 때 허 대표는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독성각의 기가 너무 세서 그 기를 받아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신비로운 일들은 낯설지 않다. 무의식과 동시성의 세계는 그녀와 동행하는 여정에 언제나 존재한다. 알 수 없는 기분을 안고 우리는 카페를 떠났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로서는 좀처럼 꺼내기 힘든 주제였다.
최근 불거진 정치권의 정의와 공정성 훼손 사태가 답답했다. 모두가 인간 탐욕에서 비롯된 일이다.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은 사회에 대한 민감성을 잃고, 그만큼 천박해지기 마련이다.
공정성이 무너지면 진실은 멀어진다. 진실은 곧 상식인데, 상식을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하나하나 확인해야만 하는 세상, 정말 웃프기 짝이 없다.

그날 늦은 오후, 우리는 예정에 없던 진관사를 찾았다. 절 입구에서 허 대표는 이상한 듯 여러 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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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아요.”

처음 방문인데도 마치 여러 차례 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웅전만 들르고 다른 전각은 둘러보지 못했다. 기운이 너무 세서 감히 들어갈 엄두를 못 냈단다.

나는 대웅전에서 예를 마치고 나한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한전 문에 ‘기도 중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찰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왠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근처 작은 전각 ‘독성전’에 들어섰다. 두 세평도 채 안 되는 작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그날처럼 마음 편한 곳은 처음이었다. 부드럽고 맑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절에 가도 땀 흘리며 기도한 적이 없었다. 항상 서둘러 절을 마치고 나왔다. 여름인데 겨울 외투를 걸친 듯,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은 달랐다.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했다.

독성전에서 마음을 가다듬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허 대표 전화였다. 다급한 목소리로 “유명한 분”이라고 말하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독성전을 나섰다.

나한전 앞에서 낯익은 얼굴, 더불어민주당의 이성윤 의원과 마주쳤다. 문성복 의원도 만났다. 예상 밖이었다.

그날 아침,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 대표직에서 물러난 것을 떠올렸다. ‘기도 중입니다’ 안내문은 정 대표를 위한 것이었고, 두 의원은 그를 보좌하기 위해 함께 온 것이었다.

초여름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지는 해를 바라봤다. 여름 해라도 저물어가는 해는 따갑지 않아 좋았다. 우리는 나한전에서 기도하는 정 대표를 기다렸다.

해가 내 시야를 가렸다. 상념에 잠기기에 적절한 순간이었다.

먼저 떠오른 것은 19세기 말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언론이 여론을 조작했던 시대. 그때 언론은 여론 전달자가 아니라 가짜 여론 제조자였다. ‘지식인’이라는 말도 그때 처음 등장했다. 반 드레퓌스 진영은 진실을 밝히려던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에밀 졸라 등을 다소 경멸적으로 ‘지식인’이라 불렀다.
에밀 졸라는 억울한 드레퓌스 대위를 변호하며 이렇게 외쳤다. 지금도 가슴 아리게 하는 말이다.

“거듭 말씀드리건대, 만일 저를 단죄하는 것이 불행한 우리나라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라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습니다….”

정의의 한 축인 절차의 공정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원해도, 직접 민주주의 시대에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명백한 불공정이며, 그게 바로 부정의다.

정치권의 한자리에 서지 않고 밖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민주주의의 뿌리인 절차적 정당성을 위협하는 무차별 도전을 말이다. 나와 같이 지켜보는 자의 분노가 더욱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권은 정청래 전 대표에게 전당대회 출마와 연임을 막으려 강압하고, 여당 내부와 다수 언론, 정치평론가까지 나서서 그를 공격하고 있다. 과거 이재명 대통령도 당 대표 출마를 만류 받은 적 있었지만, 이번처럼 조직적이고 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주장과 행동에서는 온갖 더러운 냄새가 풍긴다. 옛 선비들이 더러운 말을 듣고 일부러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가 이제야 실감 난다.

사실과 무관한 이유로, 비열한 방식으로 그를 공격하는 모습에는 몸서리칠 만큼 혐오감이 든다.
가해자가 스스로 피해자로 둔갑하고, 진정한 피해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작금의 사태는 참으로 위험하고 더러운 세상의 단면이다.

공정성이 무너지면 누군가에게는 특혜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좌절과 상처만 남는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공정성이 희생되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사회의 모든 오류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정 전 대표에게 테스 속 대사처럼 “그건 다르오”라고 되풀이 외친다. 자신들이 민주주의와 공정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 정말 알고나 있는 것일까?

‘파르헤시아’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옹기다. 직접 민주주의 시대인 고대 그리스 시민사회에서 쓰였고, 현대 지성인 푸코가 널리 알렸다. 소크라테스도 위대하게 여긴 개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파르헤시아가 절실할 때이다.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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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전 대표의 웃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정전대표가 나한전을 나서는 그 순간,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악수하면서 웃는 그의 얼굴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허 대표는 정 전 대표가 나한전에 들어갈 때는 굳은 표정이었다가 나올 때는 웃음을 띠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웃음에 서글픔이 묻어 있네요, 유튜브에서 보던 쾌활한 웃음과는 다른 아픈 웃음이네요. 제가 너무 슬퍼지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웨민쥔 그림 속 과장된 웃음을 떠올렸다. 과장되고 억지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공정성이 짓밟히고 진실과 진정성이 희미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웃음이었다.
‘테스’와 ‘골짜기의 백합’ 주인공들의 순수도 그렇게 짓밟히지 않았던가. 그것은 그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사사로운 욕심과 이해관계 때문에 희생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토머스 하디는 ‘테스’의 처형 소식을 “정의가 실현되었다”라고 마무리했다. 이것이 영문학에서 가장 잔인한 마지막 문장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까닭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도 비슷한 기억과 상처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누구에게 더 가혹할까?”
다시금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정치권 바깥과 안에서 공정과 정의를 흔드는 이들, 특히 정청래 전 대표의 출마와 연임을 막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너희들에게 정의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 것이란 말인가?”
허공으로 메아리칠 질문이지만 외치고 싶은 말이다.

진관사를 나서자 해는 산줄기 너머로 길게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길고 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이 찰나처럼 스쳐 갔다. 각기 별개의 사건 같았지만, 알 수 없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동시성 원리가 다시 한번 작용한 것이다.

김 상무의 웃음과 웨민쥔의 그림, 카페 테라스의 노란 백합, 두 권의 소설인 ‘골짜기의 백합’과 ‘테스’, 정치 이야기, 그리고 진관사에서 만난 정청래 전 대표의 웃음까지.
하루 동안 마주한 두 가지 웃음은 짧은 웃음이었으나, 그 안에는 너무나 많은 사연과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웃음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풍경은 때론 하찮거나 추할 수 있지만, 결코 웃길 수 없다. 동물들이 웃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태도나 표정을 그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재정의한 웃음의 본질이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며 구약성경 아가서 2장 1절을 천천히 읊었다. 애처롭고 무거운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며.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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