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부터 AI 시대까지, 패러다임 변화 최전선으로
IT 역사상 세 번의 거대 변곡점이 있었다. PC통신과 포털이 나타났을 때, 모바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지금의 AI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AI 서울 정상회의'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AI는 인터넷, 모바일 레벨의 거대한 파도인 것 같다"는 이 창업자의 발언은 그 자체로 위기의식의 신호였다.
네이버, 카카오, 엔씨소프트, 쏘카 등 국내 주요 테크 기업들이 국내에선 일정 수준의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글로벌 확장 부진, AI 투자 대비 성과 부족, 신사업 전략 혼선, 주가 정체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면서 기존 경영진 체제만으로는 돌파가 쉽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저비용·고성능 AI 모델로 글로벌 시장을 흔들고 있는 상황은 더욱 절박함을 더했다. 이런 환경에서 창업자가 가진 기업 DNA에 대한 이해, 대규모 투자 결정을 밀어붙일 수 있는 오너십, 그리고 글로벌 네트워크가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이해진의 '소버린 AI' 전략…네이버를 완전한 AI 기업으로
2025년 3월 26일, 네이버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7년 만에 공식적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2017년 해외 사업 집중을 이유로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정확히 7년 만의 귀환이다. 이사회 의장이라는 직책은 회사 방향성 설정의 핵심이다. 최수연 대표는 이 창업자의 복귀에 대해 "경영진에게 조언과 철학을 전달하는 역할은 계속하겠지만, 글로벌 투자와 사업 운영 책임은 온전히 경영진에게 맡겨졌다"며 새로운 거버넌스를 설명했다.
이해진의 경영 복귀는 '소버린 AI' 전략으로 요약된다. 자체 AI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 데이터센터, 글로벌 웹툰과 클라우드 등 AI 기반 포트폴리오 재편에 이 창업자가 직접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2025년 누적 3분기 매출 5조 9,786억 원, 영업이익 4,994억 원을 기록한 네이버가 중장기 성장을 위해서는 AI 경쟁력 강화가 사활이다.
이재웅의 자율주행 골든타임 방어…쏘카의 부활
포털 '다음'의 창업자 이재웅은 6년 만에 쏘카라는 무대로 돌아온다. 2020년 3월 '타다 금지법'으로 불리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대표직을 내려놨던 그가 2026년 3월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회 의장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사법 리스크는 2023년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로 해소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경영진의 결단이다.
엔씨소프트의 게임 재도약…신작과 AI 플랫폼의 두 날개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는 창업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직접 M&A와 신작 전략에 나서고 있다. 2023년 지스타 이후 약 2년 만인 2025년 11월 13일 지스타 2025의 오프닝 세션 무대에 올랐다. "과거엔 플레이어들이 대작을 수동적으로 소비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새로운 기술과 세대가 만드는 문화적 변화 속에 선택받을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엔씨의 전략은 MMORPG·슈팅·서브컬처 3개 축과 AI·클라우드 기술의 결합이다. 차세대 MMORPG 신작 '아이온2', '신더시티', '리밋브레이커스' 등 신규 포트폴리오를 통해 실적 반등을 노리고 있다. 동시에 생성형 AI 플랫폼 '바르코(VARCO)'를 게임 개발 도구를 넘어 게임 외 분야로 확대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8월 패션 AI 전문 솔루션 '바르코 아트 패션', 3D 생성형 AI 솔루션 '바르코 3D' 등을 상용화했으며, MBC, 형지그룹, 직스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업체와 협력하고 있다. 더욱 상징적인 움직임은 사명 변경이다. 엔씨소프트에서 '소프트'를 제외하고 '엔씨'로의 리브랜딩을 추진 중인데, 이는 게임사의 정체성을 벗고 AI와 기술 플랫폼 기업으로의 정체성 전환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카카오의 미래 전략…창업자의 조용한 신호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는 다른 창업자들과는 다른 경로를 걷고 있다. 2025년 3월 건강 문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지난해 10월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혐의 1심 무죄 선고 후 2년 1개월 만인 2026년 1월 15일 경기도 용인 카카오 AI캠퍼스에서 열린 신입사원 교육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카카오는 이를 '건강 회복 차원의 깜짝 방문'이라고 설명했으며, 경영 복귀설에는 선을 그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신입사원들에게 "두 번 이상 반복되는 업무는 인공지능으로 자동화해야 한다"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직접 구현해 보라"고 주문한 김 센터장의 발언은 AI 시대 카카오의 전략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카카오는 지난해 127곳에서 94곳으로 계열사를 대폭 줄인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 2025년 연결 기준 매출 8조 894억 원, 영업이익 6,871억 원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할 것으로 추산된다. 카카오톡 플랫폼과 1분기 출시 예정인 AI 비서 서비스 '카나나 인 카카오톡'이 핵심 성장 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위기와 기회가 만나는 지점…'골든타임'의 의미
기존 경영진만으로 충분했던 시대는 지났다. 네이버의 이해진, 쏘카의 이재웅, 엔씨의 김택진, 카카오의 김범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인터넷 부흥기를 이끈 벤처 1세대가 한 목소리로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은 AI 골든타임"이라는 것이다. 글로벌 AI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중국발 '가성비 AI'가 판도를 바꾸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이 주도권을 잃으면 영원한 2군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됐다.
이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대규모 투자 결정, 과감한 M&A, 조직 해체와 재편, 사업 포트폴리오의 혁신이다. 이런 결단과 속도 경영은 창업자 특유의 DNA에서 나온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붐 당시 빠른 의사결정으로 승리를 거뒀던 창업자들이 이제 AI 시대의 '골든타임'을 또 다시 잡으려 나서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AI가 IT 벤처 1세대에게 준 두 번째 기회이자 마지막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며 "지금 만드는 결정이 향후 5년, 10년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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