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 부회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1963년, 남대문시장 앞에서 명예회장님은 군납용 냄비로 끓인 국수를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셨다"며 "그때 명예회장님은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따뜻한 밥이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창업주 고 전중윤 명예회장의 이 결심이 삼양식품의 출발점이었고, 이번 신제품은 그 정신을 다시 잇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우지 파동'이라는 역사의 무게
1989년 11월 3일은 삼양식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날이다. 당시 검찰은 삼양식품 등 일부 기업이 공업용 우지를 라면 제조에 사용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다. 익명 투서로부터 비롯된 이 사건은 순식간에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고, 언론의 집중 보도와 소비자의 불신을 타고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사건 이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는 해당 우지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1995년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고, 1997년 대법원 확정 무죄 판결로 법적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의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다.
삼양식품은 우지 파동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88년만 해도 농심 54%, 삼양 26%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던 상황이었지만, 파동 이후 급격히 추락했다. 그 길고 긴 침체 속에서 1970년대까지 라면업계의 절대 강자였던 삼양식품은 결국 농심과 오뚜기에 밀려 2010년대 초중반까지 3위에 머물러야 했다.
소비자의 추억, 시간이 만든 기회
삼양식품이 우지라면을 다시 꺼낸 것은 소비자들의 인식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우지로 만든 라면의 구수하고 고소한 맛을 잊지 못한 소비자들의 재출시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건강상의 우려도 상당 부분 해소됐다. 우지의 포화지방산 함량은 약 43% 정도인 반면, 통상적으로 라면에 사용되는 팜유는 50%에 달한다. 오히려 우지가 더 낮은 수치인 것이다.
프리미엄 라인업으로 재탄생한 전설
'삼양라면 1963'은 단순한 복고 제품이 아니다. 삼양이 현대적 기술과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모두 담아낸 프리미엄 라인 상품이다. 제품의 핵심은 동물성 기름인 우지와 식물성 기름인 팜유를 황금 비율로 혼합한 '골든블렌드 오일'이다. 이 오일로 튀겨낸 면은 고소하면서도 조리 과정에서 면에서 우러나온 풍미가 육수와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됐다.
불닭의 성공, 그리고 새로운 도전
삼양식품이 이번 신제품을 야심 차게 출시하는 배경에는 불닭볶음면으로 얻은 자신감이 있다. 불닭은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고, 삼양식품은 2024년 5월 시가총액 기준으로 라면업계의 절대 강자 농심을 추월했다. 2025년에는 식품업계 최초로 시가총액 10조 원을 돌파했다. 30년 이상 계속된 침체에서 벗어난 삼양식품은 이제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내수 시장에서는 또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업계 관계자는 "불닭은 글로벌 판매를 확대하고, '삼양라면 1963'으로는 내수를 노리는 투트랙 전략을 펼치려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농심도 올해 초 창립 60주년을 맞아 '농심라면'을 출시해 초반 흥행에 성공했다. 반세기 이상 이어져 온 양사의 라이벌 구도는 '옛날 라면'으로 다시 불이 붙은 형국이다.
창업정신의 회복, 미래의 초석
김정수 부회장은 이날 발표에서 "삼양은 굶주림의 시대에는 음식으로, 위기의 시대에는 문화로, 언제나 시대의 허기를 채워왔다"고 회사의 사명을 되짚었다. 그는 이어 "60년이 흐른 뒤, 1989년 오늘과 같은 11월 3일, 우리는 억울한 오해 속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았다"며 당시의 아픔을 직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처 이후의 여정이다.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여론 속에서 우지라는 단어 하나가 우리를 무너뜨렸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소비자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한 그릇 한 그릇 진심을 담았고, 진심의 시간은 마침내 불닭볶음면이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부활했다."
36년의 기간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1989년의 검찰 조사부터 올해 신제품 출시까지, 그 세월 동안 삼양식품은 침묵과 인내로 신뢰를 회복했다. 이제 그 신뢰 위에 다시 선 삼양식품은 과거의 복원이 아닌 미래를 향한 선언을 한다.
김 부회장은 "삼양 1963은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초석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의 미식 문화를 세계로 전파하는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성장했다"며 "삼양 1963은 삼양의 정신을 잇는 새로운 출발점이자 선언이다. 60년 역사 위에서 다음 100년의 삼양을 위해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라면 한 그릇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정체성, 소비자와의 신뢰, 그리고 한국 식품업의 역사 자체를 다시 쓰는 과정이다. 1963년 창업주가 꿈꿨던 '따뜻한 밥'의 정신이 오늘 다시 우리 밥상 위에 돌아온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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