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시장의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 구성이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 TSMC, 엔비디아 세 기업의 이사회 구성을 비교해보면, 각 기업의 전략적 방향성과 경영 철학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이것이 기업 성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어벤저스' TSMC
2025년 기준, 삼성전자의 이사회는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6명이 사외이사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사회가 금융과 정책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사회 의장인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김준성 전 삼성자산운용 CIO, 허은녕 에너지·환경 정책 전문가, 유명희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조혜경 기업지배구조 및 회계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며 반도체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 회장은 "삼성전자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현재 1명뿐인 반도체 전문가를 3명으로 늘려, 본격적 경쟁력 회복에 나서겠다고 개편 취지를 밝혔지만, 이것 만으로는 부적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삼성전자 사외이사 전원이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세계 최대 전자기업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사회의 국제적 다양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반면 TSMC의 이사회는 총 10명 중 9명이 사외이사이며, 이들 대부분이 글로벌 반도체·기술·경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다. 마이클 스플린터 전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CEO, 모셰 가브리엘로브 전 자일링스 CEO, 얀시 하이 전 델타일렉트론 이사회 의장, 라펠 리프 전 MIT 총장 등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어벤저스'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특히 어슐러 번스 전 Xerox CEO와 같은 미국 상무부 공급망 경쟁력 자문위원회 부의장까지 영입하여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과 수출 관련 리스크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 TSMC의 전략적 안목을 보여준다. 사외이사 중 다수가 미국, 영국 등 외국인이라는 점도 TSMC의 글로벌 시각을 반영한다.
모리츠 창 TSMC 전 회장은 최근 한 대만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사회 이사의 조건은 업계 경력을 갖추고, CEO 성과와 비슷하거나 CEO 성과를 능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며 "이사회 의장은 지혜, 판단력, 설득력으로 이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엔비디아, 이사회 멤버 중 젠슨 황 빼고 12명이 사외이사
엔비디아의 이사회는 2025년 기준 총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CEO 젠슨 황을 제외한 12명이 사외이사다. 엔비디아 이사회의 특징은 산업 다양성과 지속성 간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Rob Burgess 전 Macromedia CEO, Tench Coxe 전 Sutter Hill Ventures 매니징 디렉터, John Dabiri 캘리포니아 공과대 교수, Persis Drell 스탠포드대 물리학 교수, Dawn Hudson 전 NFL 마케팅 최고책임자, Ellen Ochoa 전 NASA 존슨우주센터장(최초의 라티나 우주비행사) 등 반도체, 벤처캐피탈, 학계, 마케팅, 제약, 소프트웨어, 우주항공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최근 3년간 주가 변화를 살펴보면, 2021년 1월 8만원대였던 삼성전자 주가가 최근 6만원대로 하락한 반면 TSMC 주가는 650대만달러에서 최근 1000대만달러까지 급등했다. 이 기간은 AI 반도체 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엔비디아 등 관련 종목들의 주가가 급등한 시기다. TSMC와 엔비디아가 AI 시대의 기회를 포착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한 반면, 삼성전자는 기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의 이사회가 금융과 정책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된 것은 재무 안정성과 정부 관계 관리에 중점을 두는 전략을 반영한다. 반면 TSMC는 반도체 산업 전문가를 중심으로 이사회를 구성함으로써 기술 리더십과 글로벌 시장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엔비디아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장기 참여 이사들의 균형적인 구성을 통해 혁신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현대차 이사진 변화는 주목할 만
이런 가운데 현대자동차의 최근 이사진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현대차는 싱가포르 국적의 글로벌 금융사 애널리스트 출신인 벤자민 탄, 퀄컴 아시아 부회장을 지낸 도진명 씨, 다국적 회계기업 출신 김수이 씨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또한 호세 무뇨스 북미총괄을 대표이사로 임명하며, 설립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CEO를 선임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사회 구성의 글로벌화와 기술 전문성 강화가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특히 현행법상 사외이사 선임이 사실상 '오너'의 결정에 좌우되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법 개정과 함께 사외이사 선정 방식 역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기존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는 상법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사외이사들이 보다 독립적인 입장에서 경영을 견제하고 조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회복하고 AI 시대의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TSMC와 엔비디아처럼 글로벌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이사회 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글로벌 시각과 기술적 전문성을 갖춘 이사회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이사회 구성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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