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퇴직연금을 연금으로 나눠 주는 인출 시장에서도 보험사의 존재감은 아직 미약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보험업계 한 연금 전문가는 "인출 단계에서 보험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무엇을 더 잘하는지 딱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업계는 인출 시장에서 은행·증권사와 차별화할 수 있는 상품으로 종신연금을 꼽는다. 퇴직연금에서 사망 때까지 연금을 지급하는 종신연금은 생명보험사만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 통계를 바탕으로 추산하면 지난해 퇴직연금을 종신연금으로 받기 시작한 사람은 고작 2천300여명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지난달 29일 퇴직 때 일시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내놓으면서, 보험사의 연금 지급 경쟁력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3분기 점유율 반등은 하락장 효과…계열사 자금이 떠받쳐
금융권은 보험업권의 3분기 점유율 상승을 증시 하락에 따른 반사효과로 보고있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3분기말 보험업권 퇴직연금 적립금은 106조3천419억원으로, 2분기말(107조3천206억원)보다 0.91%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전체 적립금은 11조7천565억원(2.12%) 줄었다. 특히 은행업권(-2.14%)과 증권업권(-2.88%)의 감소율은 보험업권의 2~3배에 달했다. 이에 따라 보험업권 점유율은 19.38%에서 19.62%로 0.24%포인트 늘었다.
금융업권 간 성적을 가른 건 운용 구조라는 분석이다. 코스피가 3분기에만 19% 넘게 떨어지면서 주식·펀드 등 실적배당형 적립금은 12조5천억원가량 줄었다. 반면 보험사는 원금과 약정 이자를 보장하는 원리금보장형과 확정급여(DB)형 비중이 높아 하락장 충격을 덜 받았다. 실제로 퇴직연금 1위 사업자인 삼성생명은 DB형 적립금이 전체의 76.5%에 이른다.
삼성생명 한 곳이 보험업권 적립금의 54.1%를 차지하는 만큼 업권 성적표가 사실상 한 회사의 계열사 자금에 좌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권에서는 이 같은 계열사 자금 유입을 1위 탈환을 노린 결과로 보기도 한다. 한 시중은행 퇴직연금 관계자는 "삼성생명이 올해 들어 신한은행에 밀리니, 계열사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연금 받는 퇴직자 16.5% 그쳐…인출 시장 커지는데 보험사 존재감 미미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받는 퇴직자는 아직 소수다. 2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60만1천명 가운데 연금으로 받기 시작한 사람은 9만9천명(16.5%)에 불과하다.
반면 금액 기준으로는 수급 개시액 23조9천억원의 61.6%가 연금으로 나갔다. 연금 수령 계좌의 평균 적립금(1억4천891만원)이 일시금 계좌(1천833만원)의 8배를 웃돌 만큼, 적립금이 많은 가입자를 중심으로 연금을 택했다는 분석이다.
연금으로 받는 경우에도 수령 기간은 짧았다. 연금 수급자의 81.8%가 10년 이하를 택했고, 10~20년은 15.9%였다. 특히 20년을 넘겨 받겠다는 비율은 2.3%에 그쳤다.
당국은 종신형 수령 인원을 따로 집계하지 않지만, 종신형은 20년 초과 구간에만 포함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한 결과, 종신연금 선택자는 연금 수급자 9만9천명의 2.3%인 최대 2천300명 수준이었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베이비부머 은퇴가 본격화하면 퇴직연금의 무게중심이 적립에서 인출로 옮겨갈 것으로 본다. 하지만 지금처럼 단기 수령이 대부분이면 평생 지급이 가능한 보험사의 강점은 드러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런데도 보험사들은 장기 수령을 끌어낼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보험업계 한 연금 전문가는 “인출 단계에서 보험사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종신연금은 생보사만 가능한데…가입자도 보험사도 외면
퇴직연금에서 종신연금은 생명보험사만 지급할 수 있지만, 가입자와 보험사 모두 이 상품을 외면하고 있다. 종신연금은 사망 보험금을 주는 종신보험과 달리 살아 있는 동안 매달 연금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이와 달리 손해보험사와 은행·증권사 계좌에서는 정해진 기간에 나눠 받는 방식만 가능하다.
대형 회계법인의 한 연금계리 전문가는 그럼에도 보험사의 활로는 종신연금에 있다고 봤다. 그는 "생명보험사만 장수위험을 다룰 수 있는 만큼, 오래 살수록 이익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상 전환 절차는 복잡하지 않다. 생보사 퇴직연금 가입자는 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 적립금을 종신연금으로 계약 전환하거나 일시납으로 새로 가입하면 된다. 다만 한 대형 생보사 퇴직연금 관계자는 "원하면 종신으로 받을 수 있다"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가입자들이 종신연금을 꺼리는 이유로 생보업계는 목돈 선호를 꼽는다. 한번 종신연금으로 전환하면 적립금을 한꺼번에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적립금이 많은 대기업 임원들도 일부만 연금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다른 데 쓴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연금을 택하더라도 기간을 정해 나눠 받는 확정기간 연금을 고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이다.
보험사들도 종신연금 판매에 적극적이지 않다. 앞의 연금계리 전문가는 회계제도 변화를 원인으로 들었다. 그는 "IFRS17(새 국제회계기준) 도입 이후 저축성보험의 매력이 떨어지면서 보험사들이 연금도 팔려고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새 회계기준에서는 만기에 돌려줘야 하는 저축성보험료가 부채로 잡히는 만큼, 연금 같은 저축성보험은 보장성보험보다 팔 유인이 적다는 분석이다. 보험연구원도 2021년 보고서에서 생보사들이 IFRS17과 신지급여력제도(K-ICS) 도입을 앞두고 보장성보험 판매를 늘리고 연금보험 판매를 줄여 왔다고 짚었다.
실제로 IFRS17이 도입된 2023년을 전후해 생보사 저축성보험 판매는 크게 줄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생보사 저축성보험 수입보험료는 2022년 45조2천626억원에서 2024년 28조7천986억원으로 17조원가량 감소했다.
보장 기능 얹은 연금은 규제에 막혀…미래에셋생명 20년 보증형이 첫발
보험업계는 연금에 보험 고유의 보장 기능을 얹은 상품으로도 차별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규제에 막혀 있다.
보험권 싱크탱크인 보험연구원은 지난달 펴낸 CEO리포트 '퇴직연금 환경변화와 보험산업의 경쟁력 제고 방안'에서 감독규정을 걸림돌로 꼽았다. 현행 퇴직연금감독규정(제8조의3)상 적립금으로 고를 수 있는 운용상품은 저축성보험과 투자상품 위주로 짜여 있다. 이 때문에 사망·장해·장기요양 같은 노후위험을 보장하는 상품은 퇴직연금 적립금으로 가입할 수 없다.
보고서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1조가 법의 목적을 '근로자의 안정적인 노후생활 보장'으로 정한 만큼, 보장성 상품의 활용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생명·손해보험사들은 과거 보장 기능을 갖춘 연금 상품을 금융위원회에 제안했지만, 금융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퇴직연금 수익률이 1~2%대에 머물러, 보장 비용까지 더하면 수익률이 더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에서 이런 한계를 일부 보완한 상품으로는 미래에셋생명이 올해 초 내놓은 IRP 전용 '보증형 실적배당보험'이 있다. 이 상품은 투자 실적에 따라 적립금을 굴리면서 연금 개시 후 20년간 약정 연금액 지급을 보증한다. 다만 보증 기간이 20년에 그쳐 사망 때까지 연금을 주는 종신연금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 일시금 대신 연금 수령 유도…종신연금 경쟁력은 과제
정부는 퇴직연금을 일시금 대신 연금으로 받도록 유도하고 나섰다. 고용노동부와 재정경제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9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와 당정협의를 거쳐 '퇴직연금 기능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방안은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큰 축이지만, 연금 수령을 기본값으로 바꾸는 내용도 담았다. 가입자가 퇴직 때 일시금 수령을 따로 신청하지 않으면 연금으로 지급하는 옵트아웃 방식이다. 정부는 이달 중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을 마련해 연내 국회 통과를 추진할 계획이다.
장기 수령을 유도하는 세제 혜택은 이미 시행 중이다. 올해부터 사적연금을 사망 때까지 받기로 한 가입자는 나이와 관계없이 연금소득세를 3%만 내면 된다. 퇴직소득을 연금으로 받을 경우 수령 21년 차부터는 퇴직소득세 감면율도 기존 최고치(11년 차 이후 40%)보다 높은 50%로 올랐다.
보험사로서는 적립금 유치만으로 외형을 키우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보험연구원은 지난달 22일 세미나에서 생명보험 퇴직연금 수입보험료가 올해 급증한 데 따른 기저효과로 내년 3.6%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보험업계가 연금을 지급하는 인출 단계의 경쟁력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험연구원은 앞의 CEO리포트에서도 보험사의 역할 전환을 주문했다. 원리금보장형 상품 공급자에서 벗어나 장수위험 관리와 연금 지급 기능을 갖춘 노후보장 사업자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방안대로 연금 수령이 기본값이 되면 연금으로 받는 퇴직자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해진 기간에 나눠 받는 연금은 은행·증권사 계좌에서도 가능하다. 지금처럼 수급자 10명 중 8명이 10년 이하 단기 수령에 몰리는 구조라면, 늘어난 연금 수요가 생보사만 줄 수 있는 종신연금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이에 하락장 반사효과로 점유율을 끌어올린 보험사들이 인출 시장에서도 앞서려면 종신연금 경쟁력부터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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