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최윤범 회장은 사내이사로 재선임되면서 경영권 수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사회 구도의 변화와 국민연금의 '미행사' 결정은 이 승리가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경영권 분쟁의 점수판 - 표결 결과로 본 명확한 승패
이날 주총의 핵심 안건은 임기 만료 이사 6명의 후임 선임이었다. 최 회장 측이 제안한 '이사 5인 선임안'은 출석 주식 수 1858만 189주 중 1170만 2643주의 찬성으로 62.98%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가결됐다. 반면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이 제안한 '이사 6인 선임안'은 52.21%에 그치며 부결됐다.
이 숫자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2024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1년 반의 격전에서 최 회장이 명확한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지분율로만 보면 영풍·MBK 연합이 41.1%로 최 회장 측의 37.9%를 앞선다. 하지만 표결 결과는 정반대였다. 최 회장 측이 집중투표제를 활용하고 기관투자가들의 지지를 확보한 덕분이다.
이미지 확대보기최 회장의 경영권 수성 성공 뒤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이 최 회장 재선임안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지난 19일 회의를 열어 최윤범, 황덕남, 박병욱 이사 후보에 대해 의결권 미행사를 결정했다. 명목상 이유는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 침해 이력'이었다.
집중투표제 하에서 의결권 미행사는 사실상 반대표와 같은 의미다. 이 결정은 글래스루이스, ISS 등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 7곳이 최 회장 재선임에 찬성을 권고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흥미로운 점은 국민연금이 크루서블 JV의 월터 필드 맥라렌 후보에 대해서는 의결권의 절반을 찬성으로 행사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이를 '미국 제련소 프로젝트의 상징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최 회장 경영권에 대한 국민연금의 신뢰 부족을 명백히 드러내는 신호였다.
기업 실적으로 표를 모은 최윤범 회장
고려아연은 2025년 연간 매출액 16조 5812억원, 영업이익 1조 2324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대비 각각 37.6%, 70.4% 증가한 사상 최대 실적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성장성뿐 아니라 수익성도 동시에 달성했다는 것인데, 2025년 연간 영업이익률은 7.4%로 전년대비 1.4%포인트 상승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에도 연간 영업흑자를 내면서 44년 연속, 분기실적 발표가 의무화된 2000년 이후로는 104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달성했다.
최 회장이 2022년 12월 취임한 이후의 실적도 인상적이다. 최윤범 회장이 대표이사로서 본격적으로 경영을 이끈 2019년 3월 22일부터 2026년 2월 25일까지 총주주수익률(TSR)은 465.6%에 이른다. 이는 업종 평균(KRX Steels Index)보다 3배 가까이 높은 수치로, 같은 기간 고려아연 이사회 장악을 노리는 영풍의 TSR은 -9.5%다.
산업계 우호지분의 전략적 역할 - 한화와 LG의 선택
최 회장의 경영권 수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화, LG화학, 크루서블 JV 같은 우호지분들이었다. 최 회장 측의 직접 지분 17.7%에 한화그룹의 7.7%, LG화학의 1.9%, 크루서블 JV의 10.6%를 합치면 37.9%가 되어 영풍·MBK의 41.1%와 팽팽한 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주총 이후 한화그룹이 지분 7.25%를 환화에너지에 매각한 것이다. 업계는 이를 최 회장 측의 경영권 분쟁 승리가 확실해진 이후의 선택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현재 여전히 고려아연 지분 총 7.8%를 보유 중이다. 다만 한화그룹의 향후 지분 움직임은 최 회장 측이 주시해야 할 부분이다.
LG화학도 주총 전까지는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최 회장 측이 기관투자가들의 지지와 집중투표제를 활용해 충분한 의결권을 확보하면서 양사 모두 최 회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지 확대보기이사회 9대 5, 격차 축소와 미래의 불확실성
그러나 이사회 구성의 변화는 생각보다 미묘한 신호를 담고 있다. 이사회는 '11대 4'에서 '9대 5'로 재편되었다. 최 회장 측이 여전히 과반을 유지했지만, 격차는 7명에서 4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고려아연의 팽팽한 지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다. 최윤범 회장 측 우호 지분 37.9% 대 영풍·MBK 41.1%라는 구도에서 양측이 벌인 표 대결에서 최 회장 측이 기관투자가와 자문사들의 지지로 이겼지만, 영풍·MBK 측도 이사회 진입에 성공하면서 견제력을 확보했다. 이사회 내 MBK·영풍 측 비중이 26.7%에서 35.7%로 높아졌고, 이사 수도 4명에서 5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앞으로의 경영권 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향후 임시주주총회나 다음 정기주주총회에서는 영풍·MBK가 이 격차를 더 좁힐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
감사위원 안건은 부결 - 영풍·MBK의 전략적 선택
최 회장 측이 감사위원 확대 안건에서 패배를 맛봤다. 이 안건은 올해 9월 시행되는 개정 상법에 대응하기 위해 분리선출 감사위원을 1명에서 2명으로 확대하는 정관 변경안이었다. 실제 표결 결과는 출석 의결권 기준 53.89%, 발행주식 총수 기준 48.71%로 과반을 훨씬 넘었다.
그런데 왜 부결되었는가. 정관 변경 안건은 특별결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석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과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필요한데, 감사위원 안건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의결권 자문사 7곳 중 5곳, 그리고 국민연금까지 이 안건에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부결된 것은 영풍·MBK의 명시적 반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시에는 주주별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지분이 집중된 영풍·MBK는 의결권 제약이 크지만, 지분이 분산된 최 회장 측은 여러 주주가 각각 3%씩 행사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이를 알았기에 영풍·MBK는 감사위원 확대를 일단 저지하고, 향후 임시주주총회에서 지배구조를 다시 조율할 기회를 남겼다.
프로라타 방식 논란 - 새로운 법적 전선의 시작
이사 선임 과정에서 집중투표제 표결 기준을 둘러싼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날 고려아연은 해외 기관투자가의 미행사 의결권까지 포함해 비례적으로 재배분하는 '프로라타(pro rata)' 방식을 적용했다. 영풍·MBK는 이를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해 정기주총에서는 실제 행사된 의결권만 인정했으나, 이번에는 미행사 의결권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기준을 변경했다는 주장이다.
이 논란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에 직접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풍·MBK 측은 이를 '임의적으로 주주 표결을 회사가 조정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향후 법원에 신임 이사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경영권 분쟁의 또 다른 법적 전선이 될 전망이다.
75년의 동업 관계 종말, 그리고 새로운 시작
2026년 3월 24일의 주총은 경영권 싸움이 단순한 이분법적 '승패'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최 회장은 경영권 수성에 성공했고, 영풍·MBK는 견제력을 강화했다. 양측 모두 '부분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75년을 함께해온 '한 지붕 두 가족' 경영 체제는 이제 과거의 얘기가 되었다. 최 회장이 내세운 '트로이카 드라이브' 신사업 전략과 영풍의 보수적 배당정책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주주권 침해 논란, 상호주 의결권 제한, 신주 발행 분쟁, 그리고 이제 집중투표제 표결 기준 논란까지 일련의 법정 싸움이 양사 간의 신뢰를 깎아먹었다. 경영방식의 차이를 넘어 '신뢰의 붕괴'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 역사에서 이 같은 경우는 드물다. 창업주 시대부터 함께해온 형제기업이 3세 경영 세대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결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최 회장의 경영권 수성으로 점 하나가 찍혔지만, 고려아연 그룹의 여정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추진하는 제련소 건설이라는 대형 투자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이사회 내 반대 세력과의 마찰을 감수해야 한다. 신사업 투자 승인, 국제 경쟁력 강화, 그리고 영풍과의 관계 개선까지 앞으로의 과제는 오늘의 경영권 수성 승리보다 훨씬 무겁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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