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AI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길에 이번 기부가 작은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는 김재철의 메시지에는 단순한 나눔을 넘어 미래 경제의 핵심 분야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려는 전략이 담겨 있다.
이렇게 특정 분야에 집중해서 국가의 미래를 함께 준비하려는 기업인의 철학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테마형 기부'가 어떻게 가능해졌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인들의 기부가 지난 50년간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1970년대의 초대형 재단 설립에서부터 시작된 사회 환원의 철학이 어떻게 현재의 전략적이고 선제적인 고액 기부로 변화했는지 살펴보면, 한국 경제 발전사와 재계의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반 마련: 1970년대 재단 설립형 기부의 시작
기업인의 사회 환원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1970년대였다.
당시만 해도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은 선택이 아닌 새로운 도전이었다. 1977년 7월 현대건설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며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은 당시로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였다. 정주영 회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설립 취지 아래 500억 원을 출연했고, 이후 40년 동안 의료·장학·사회복지 분야에서 누적 2,556억 원을 지원하는 장기적 재단형 기부 모델을 구축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농어촌 지역 병원 건설에서 시작해 1989년 서울아산병원을 개원하며 세계적 수준의 종합의료기관으로 발전했고, 이는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개념을 한국에 정착시킨 이정표가 되었다.
이러한 재단형 기부는 단순한 자선을 넘어 지속 가능한 사회 기반 조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1970년대에 씨앗이 된 재단형 기부의 전통은 다음 세대 기업인들에게 단순한 모델을 넘어 하나의 책임감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정주영 세대가 기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정립했다면, 21세기에 접어든 재벌 2·3세 경영진들은 이를 더욱 체계적이고 다양하게 확장시켰다. 이 시기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2011년 정주영 회장 서거 10주기를 기념해 설립된 아산나눔재단이다. 정몽준 전 의원을 비롯한 창업자 가족들과 현대중공업 등 11개 범(凡) 현대 계열사가 5,000억 원을 출연한 이 재단은 당시 삼성그룹의 8,000억 원 규모 장학재단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규모였다. 이 중 정몽준이 개인적으로 기부한 2,000억 원(현금 300억 원, 주식 1,700억 원)과 현대중공업 그룹 6개사의 2,380억 원 출연은 개인과 기업이 함께하는 새로운 기부 모델을 제시했다.
동시에 삼성그룹도 기부의 규모와 체계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2010년 이후 2021년까지 삼성전자의 누적 기부금만 3조 원을 넘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500대 기업 중 유일하게 매년 1,000억 원 이상을 기부하는 '기부 1,000억 클럽'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단발성 기부에서 구조화된 연례 지출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혁신과 도약: 2020년대 테마형·ESG형 기부 부상 - 미래 전략의 실현
KAIST의 김재철 AI대학원이 2028년 2월 완공될 때, 그곳에는 교수진 50명과 학생 1,000명이 상주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연구 거점이 구축될 예정이다. 이는 단순히 교육시설 건축이 아닌, 한국이 AI 경쟁에서 세계 1위를 목표로 하는 국가적 전략과 개인 기부인의 비전이 만나는 지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재철이 2019년 한양대에 30억 원으로 'AI솔루션센터'를 설립하고, 지난해에는 서울대에 250억 원을 기부해 'AI클래스'를 개설한 것처럼, AI 분야 전체에 대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부가 더 이상 일회성 선행이 아닌, 한 기업인의 경제관과 국가 비전이 맞물리는 구체적 실천으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산 처리 역시 ESG 시대의 새로운 기부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총 26조 원에 달하는 유산 중 약 60%를 상속세와 기부로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2021년의 결정은, 사후의 자산까지도 사회를 위한 기부로 전환시킨 선례다. 이 중 1조 원은 감염병 대응·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에 기부되었다. 이 같은 결정으로 5,000억 원 규모의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이 2028년 완공될 예정이며, 여기에는 이건희의 생전 약속이었던 사회환원의 의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
이렇게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테마형 기부와 장기적 비전을 담은 ESG형 기부가 확산되면서, 한편으로는 기업인들의 사회 환원이 더욱 광범위하고 정례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연례화된 대규모 성금: 사회공헌 관습화와 제도화
재계 총수들 사이에서 연말 대규모 성금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희망 나눔 캠페인'에 2025년 350억 원을 전달했는데, 이는 전년도 250억 원에서 100억 원 증액한 규모다. 현대차그룹은 2003년부터 이 캠페인에 매년 성금을 전달해왔으며, 올해까지 23년간 누적 4,640억 원을 기탁했다. 이러한 연례 성금은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최대 규모로 평가되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도 불황 속에서도 매년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대의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기업 차원의 기부도 구조화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500대 기업 중 유일하게 매년 1,000억 원 이상을 기부하는 기업으로, 최근 10년간 약 2조8,800억 원을 기부해 3조 원에 근접했다. 2025년 3분기 기준 삼성전자가 1,104억 원으로 기부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전력공사(1,092억 원), 현대차(1,069억 원)도 1,000억 원대의 연간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기아(561억 원), 포스코(478억 원), SK하이닉스(590억 원) 등도 수백억 원대의 기부로 '기부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는 대기업의 사회공헌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기부는 기업의 재무제표에 기록되는 항목을 넘어, 기업이 사회와 맺는 관계의 핵심 지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변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50년의 진화, 미래를 향한 한걸음
서두에서 살펴본 김재철 회장의 603억 원 KAIST 기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1977년 정주영 회장의 500억 원 출연에서 시작되어 반세기에 걸쳐 진화해온 한국 기업인의 기부 정신이 현재 어디에 도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인 것이다. 초기의 사회복지 중심 재단형 기부에서 시작해 글로벌 경제 위기 속 지속 가능한 사회 기반 조성, 그리고 현재의 AI·감염병·환경 등 미래의 핵심 이슈에 대한 전략적 투자로 변화한 것이다.
이 변화의 핵심은 기부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과거에 기부가 기업의 이윤에서 나온 '남은 것'의 분배였다면, 현재의 기부는 기업인의 철학과 국가의 미래 전략이 만나는 '선제적 투자'로 진화했다. 김재철 회장이 단순히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AI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길"에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고 명시한 것은, 기부가 더 이상 과거의 의무적 사회 책임이 아닌 미래를 함께 만드는 전략적 파트너십임을 상징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경제 발전에 따른 기업인들의 사회적 책임 의식 고양과 경제 환경의 변화가 있다. 재벌 총수에서 출발한 기부가 이제는 중견기업, 중소기업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으며, 기부의 분야도 의료·교육·복지에서 환경·기술·문화로 다양화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부가 더 이상 개인의 자선이 아닌 기업 경영의 핵심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한국 기업인의 기부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새로운 도전 과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AI 시대의 인재 양성, 기후 변화 대응, 사회양극화 해소 등은 정부만의 책임이 아닌 기업과 개인이 함께 해야 할 과제다. 김재철 회장이 보여준 것처럼, 기부의 역사가 계속 쓰여가려면 한국 기업인들이 단순한 사회 환원을 넘어 미래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603억 원 기부는 과거 50년의 진화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50년을 향한 새로운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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