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쏟아낸 말의 끝은 늘 씁쓸했다. 괜히 끼어들었다는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나는 그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어느 날, 그 기이한 꿈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낡은 나무 대문을 밀고 마루에 올라서자마자, 방 안에서 중년 여인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가 고개를 내밀더니 나를 힐끗 보며 혀를 찼다.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어안이 벙벙했다. 대문을 들어서서 마루에 서기까지 불과 5초, 나는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선(機先)을 제압당한 채 나는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더듬거렸다. 그 집을 나온 후의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당혹감에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누가 나를 그 골목으로 이끌었는지, 그 여인의 얼굴이 어떠했는지조차 묘연한, 온통 안개 속 같은 기억이었다.
꿈은 성남 오거리 역 근처의 낡은 골목에서 시작되곤 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골목을 두 번 꺾어 들어가면, 막다른 길 끝에 그 허름한 집이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은 늘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그 낡은 나무 대문 집은 사실 먼 과거에 내가 실제로 발을 들였던 장소였다. 잊힌 줄 알았던 오래전의 기억이 생생한 꿈이 되어 다시 솟구친 것이다. 나는 내 무의식의 심연 속에 쓰레기봉투처럼 묶어 던져두었던 상처의 조각들을 하나씩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 꿈은 내가 외면해온 진실의 파편이었다.
꿈속의 도시는 파괴되어 있었다. 파멸의 냄새가 도처에 깃들었고, 도시는 죽음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살아 숨 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피 묻은 칼을 조심스레 쥐고 도시의 숨소리를 찾으러 한 걸음씩 나아갔다.
깨어나면 이부자리가 땀으로 젖어있었고, 악몽이 매일 아침을 열던 시절이었다. 성남 오거리 역에 갔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인생의 정상에 서 본 적이 없다. 늘 정상을 코앞에 두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실패의 반복은 내 마음속에 ‘이것 또한 운명’이라는 차가운 숙명론을 심어주었다. ‘운명일 뿐’이라는 체념 말이다.
그런데 운명에 의해 강제로 침묵 당하던 시간들이 지루하게 끝없이 연결되던 시간들 사이로, 낡은 나무 대문집의 중년 여성이 비집고 들아와 나를 도발한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꿈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시끄럽다, 너무 말이 많다.”
그 말은 내가 그토록 찾던 퍼즐의 결정적인 조각이었다. 그녀는 강제된 침묵이 아닌, 진정한 침묵, ‘내면의 침묵’이라는 퍼즐 조각을 내게 건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침묵은 단지 소음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침묵이 아니다. 진짜 침묵은 마음의 소요가 멎은 상태다. 타인을 정의하고, 평가하고, 해석하려는 그 끊임없는 분별의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침묵의 시작이었고 ‘강자의 침묵’이었다.
초기 기독교 수도승 포이멘의 말처럼, 겉으로는 고요해도 마음속으로 남을 비난하는 자는 온종일 재잘거리는 것과 다름없다. 반대로 하루 종일 말을 하면서도 그 마음이 참된 침묵 속에 머무는 이도 있는 법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장면이 선명하게 남는다. 시골 마을에서 떠돌이 개 한 마리가 동네 개 네 마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끄럽게 짖으며 위협하는 무리 앞에서 떠돌이 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빙빙 돌며 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결국, 소란스럽던 개들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쳤다. 그것은 소음 속에서의 압도적인 침묵, 강자의 침묵이었다.
비슷한 이야기는 고대 중국 장자(莊子)의 ‘목계(木鷄)’ 일화에도 나온다. 다른 닭이 울어도 흔들리지 않고,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닭처럼 덕이 완전해진 상태. 장자는 이를 두고 '완성'이 아닌 ‘거의(幾矣, 기의)’라는 표현을 썼다. 최고의 싸움닭을 만들어달라는 왕의 주문에 기성자가 마지막에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마치 나무로 만든 닭(木鷄, 목계) 같습니다. 그 덕이 완전해지니,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왜 ‘완성’이라 하지 않았을까. ‘거의’는 우리 삶과 가장 닮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삶에는 완성이 없다. 완성을 향해 달려갈 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삶은 멈춰버린다. 멈춤은 죽음일 뿐, 우리는 언제나 길 위의 존재다.
다시 그림 앞에 선다. 그림의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 내 손에는 그 구멍에 꼭 맞을 퍼즐 조각이 들려 있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다. 삶은 구멍 난 그림에 퍼즐을 맞추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한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또 다른 빈칸이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퍼즐 맞추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자.
나는 자기 자랑하듯 이야기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내 마음 상태를 깨닫지 못했다.
‘내가 지독히도 침묵을 거부하는지를…’
하지만 말을 쏟아놓고 나면, 내면에 패배감만 남았다. 내면의 패배감은 약자의 전유물인 수치심의 다른 말이다.
말이 나를 마비시키고 수렁에 빠지게 했다. 그것은 타인의 평가에 집착하며 자존심이 번민에 빠진 탓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말이 그치는 곳에서 비로소 강자의 침묵이 시작된다. 하지만 입을 다문다고 해서 침묵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소음이 잦아든 그 자리에서 ‘참된 나’를 마주칠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다.
이제 이 깊은 내면의 침묵 속에서, 나는 비로소 도시가 숨 쉬는 소리를, 그리고 내 영혼이 속삭임을 들을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나의 삶은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오늘, 그 사실이 나를 조금은 안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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