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르는 오너 3·4세의 등장
올해 제약업계의 임원 인사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였다. 오너 일가의 후계자들이 중요 직책에 속속 배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동제약그룹은 1월 1일자로 윤웅섭 대표이사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다. 창업주 3세인 윤웅섭 회장은 2005년 일동제약에 입사한 이후 전략기획, 프로세스 혁신(PI), 기획조정실 등 핵심 부서를 거치며 경영 경험을 쌓았다. 2014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2016년 기업 체제 재편과 지주사 전환을 통해 사업 구조를 정비했고, 이후 신약 개발 역량 강화에 집중해왔다. 현재는 GLP-1 계열 비만치료제, P-CAB 소화성궤양치료제, PARP 저해 항암제 등 신약 파이프라인을 추진 중이다.
국제약품도 오너 3세의 경영 체제를 강화했다. 남태훈 대표이사는 지난해 12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2009년 입사한 남 부회장은 영업, 마케팅, 관리 부서를 두루 거친 뒤 2017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고, 이후 영업·마케팅 중심의 조직 재정비를 주도하며 비용 구조를 개선해왔다. 향후 그는 최고운영책임자(COO) 역할을 포함해 사업 전반과 중장기 성장 전략을 총괄할 예정이다.
종근당에서도 오너 3세의 위상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이장한 회장의 장남 이주원 이사는 지난해 이사로 승진한 지 1년 만에 상무로 올라섰다. 1987년생인 이 상무는 2018년 종근당산업 사내이사로 경영에 참여한 이후 개발기획 업무를 중심으로 커리어를 쌓아왔다. 특히 지난해 9월 종근당의 자회사인 경보제약의 지분을 증여받아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하면서 장남 승계 구도가 보다 명확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JW그룹에서도 오너 4세인 이기환 매니저가 경영 수업을 본격화했다. 1997년생인 이 매니저는 이경하 JW홀딩스 회장의 장남으로, 지주사 JW홀딩스에서 핵심 사업회사인 JW중외제약으로 이동하며 경영 현장 경험을 쌓고 있다. 2022년 JW홀딩스에 입사한 이후 경영기획 등 지주사 핵심 업무를 맡으며 그룹 전반의 구조와 전략을 파악해온 그는, 이번 인사가 단순한 직무 변경이 아닌 후계자 양성의 신호탄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통 제약과 바이오의 심화된 격차
제약업계의 세대교체 움직임 배경에는 산업 전반의 구조적 위기가 깔려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통 제약사와 바이오 기업 간의 성과 격차다.
전통 제약사 중심의 사업 구조, 특히 제네릭(복제약) 사업에 의존하는 비즈니스 모델로는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글로벌 경쟁 심화 속에서 신약 개발 능력이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 간의 수익성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정부 약가 인하 정책으로 인한 이중 압박
여기에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이 추가되면서 제약사들의 경영 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는 제네릭 의약품과 특허 만료 의약품의 약가를 현행 53% 수준에서 40% 수준까지 낮추는 약가인하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는 단순히 약가가 내려간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약가 인하로 인해 연간 1조2000억원 이상의 매출 감소가 예상되고 있다. 성장 둔화와 수익성 악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경영 체질 개선과 사업 구조 재편이 절실한 상황이 된 것이다.
전통 제약사들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제네릭 약품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약가 인하 정책은 이들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악재다. 더욱이 이러한 악재가 성장 둔화와 겹치면서, 제약업계는 근본적인 경영 혁신이 필요한 시점에 접어들었다.
빠른 의사결정과 책임경영으로의 전환
업계에서는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오너 경영으로의 회귀가 하나의 해결책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문경영인 체제 아래에서는 단기 실적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오너가 직접 경영을 주도할 경우, 단기 실적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져 신약 개발과 글로벌 진출 같은 장기 전략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고 책임경영을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빠른 의사결정과 일관된 경영 방침이 필요해진다는 업계의 판단이 반영된 결과다.
특히 신약 개발과 글로벌 시장 진출은 수년 이상의 중장기 투자가 필요한 영역이다. 단기 실적 변동성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경영 체제가 있을 때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기 경영 노출을 통한 세대교체 전략
주목할 점은 제약사들이 단순히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너 차세대를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에 임원으로 선임하여 조기에 경영 현장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영 경험 축적과 시장에 대한 명확한 승계 신호를 동시에 제공하는 전략이다.
종근당의 이주원 상무는 1987년생으로 현재 39세인데, 2018년 입사 이후 개발 전략 분야에서 경력을 쌓다 불과 6년 만에 상무에 올랐다. 국제약품의 남태훈 부회장도 1980년생으로, 2009년 입사 후 17년 만에 대표이사가 되었고 이후 9년 만에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는 전통적인 장기간의 단계적 승진 구조와 달라지는 패턴을 보여준다.
성과로 증명해야 할 시기
다만 업계에서는 이러한 세대교체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낙관하지만은 않고 있다. 제약 산업의 특수성 때문이다.
신약 개발은 임상 단계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고, 글로벌 시장 진출도 규제 리스크가 크다. 따라서 젊은 오너 경영이 곧바로 성과로 이어지려면 충분한 전문성과 실행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세대교체의 성패는 결국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며 "불안한 상황 속에서 혈연이 아니라, 오너 3·4세들이 얼마나 전문성과 글로벌 감각을 갖춘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일동제약의 경우 윤웅섭 회장이 공동 대표이사로 전문경영인 이재준 사장과 함께 경영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오너의 장기 전략 수립과 빠른 의사결정, 전문경영인의 글로벌 전문성과 실행력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위기와 기회의 교차로에서
제약업계의 오너 세대교체는 근본적으로는 산업 전반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저성장, 약가 인하, 글로벌 경쟁 심화라는 삼중 악재가 겹쳐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경영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등장한 오너 3·4세들에게 기대되는 것도 크다. 신약 개발에 대한 투자 확대, 글로벌 시장 진출, 사업 구조의 근본적 재편 등을 과감하게 추진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향후 2~3년이 제약업계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너 세대교체가 단순한 경영진 변경을 넘어, 한국 제약산업의 구조적 재편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주목되는 이유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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