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제 자신의 감성에 맞는 연기를 찾은 것 같다. 진짜 여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고보결은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배우로서도, 개인으로도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MBC 금토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극본 서주연, 연출 변영주, 이하 백설공주)은 그에게 큰 변환점이 됐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장르적인 특성상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많이 알리면 좋겠다고 소박하게 생각했는데 잘 나왔다는 소문이 있어서 기대를 많이 하긴 했어요. 이렇게 입소문으로 조금씩 시청률이 오르는 걸 보고 저희끼리 난리가 났어요. 마지막 회가 방송되던 날, 관계자분들이 '이렇게 오롯이 작품의 힘으로 시청률이 올라가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가 매 씬 진심을 다해 소중하게 만든 작품인데, 그 케미를 시청자들이 알아봐 주신 것 같아요.”
‘백설공주’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살인 전과자가 된 청년 고정우(변요한)가 10년 후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담은 역추적 범죄 스릴러.
“변영주 감독님은 팬이었는데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했어요. 실제로 작업을 했을 때도 어떻게 그렇게 좋은 작품이 나왔는지 알겠더라고요. 배우에게 디렉팅을 할 때도 배우의 잠재력을 이끌어 주시고 배우에게 한계가 없게끔 탁월한 디렉팅을 해주셔서 신뢰가 저절로 생겼어요. 워낙 리더십이 좋으셔서 제가 '대장님'이라고도 불렀어요.”
극 중 고보결은 톱배우이자 고정우의 절친 최나겸 역을 맡았다. 오랫동안 정우를 짝사랑해 온 나겸은 교도소에 간 정우를 10년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며 출소 후 정우와의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인물이다.
“변영주 감독님이 이 작품의 장르는 스릴러지만, 나겸이는 멜로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거기서 연기의 해답을 얻었어요. 스릴러에 맞는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나겸이의 마음을 읽는 데 더 집중했어요. 최나겸은 실제 모습을 감추려고 하지만, 그런데도 모난 부분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인물이었어요. 그런 나겸이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부터 하루씩 복기하며 그의 사고를 따라가 봤어요.”
최나겸은 이 드라마의 판을 짠 인물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짝사랑이 집착이 되어, 결국 그 상대를 처절히 망가트려서도 가지겠다는 발상을 한다. 고보결은 쉽지 않은 인물 최나겸을 맡아 극과 극의 감정을 유연하게 오가며 입체적인 캐릭터를 그려냈다.
“광기 어린 집착이죠. 보통 사람의 사랑은 아니잖아요. 정우가 있어야 완성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빛날 수 있는 존재였는데, 정우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지니고 사는 인물이죠. 나겸이 당연히 질타를 받아 마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저도 그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했어요. 저도 나겸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일기를 썼고, 나겸이 친구들에게 느낀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집중했죠. 정우가 나겸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나겸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생각했어요. 다른 작품을 할 때도 일지를 자주 써요. 서 있기만 해도 그 배역으로 보이는 연기를 목표로 하는데, 일지를 쓰는 게 그 인물에 대한 최대한 많은 디테일을 머금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아요.”
고보결은 맑은 눈망울에 생글생글 웃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비릿한 미소와 섬뜩한 눈빛을 드러냈다. 특히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 눈썹, 입꼬리는 나겸이 느끼는 불안, 분노, 절망 등의 복합적인 심리를 오롯이 전달해 감탄을 자아냈다.
“최나겸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 예쁠 것 같은 모습을 조각조각 붙여놓은 느낌이었어요. ‘정우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대중이 원하는 배우 최나겸은 누구일까?’를 고민하는데, 모든 기준이 타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죠. 자기 인생이 남에게만 맞춰져 있다 보니 공허함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나겸이가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고정우에게 집착하듯이 저는 연기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러블리함 속 날카로운 질투심과 집착을 지닌 초반부부터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는 중반부 지점의 긴장감, 후반부의 막장급 빌런 연기까지 고보결의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큰 화제가 됐다.
“정우는 나겸이를 완성시켜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나겸이는 항상 열등감, 자격지심이 있고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정우가 내 품이 와야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자신을 완성 시키는 조각을 찾듯이 갈망한 것 같아요.”
최나겸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자신만 있겠다는 비뚤어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럼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매장시킨다. 극 후반부 최나겸은 고정우의 곁에 있는 하설(김보라 분)을 제거하고 그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고정우를 납치하거나 강제 키스를 하는 등의 행위로 시청자들을 경악케 했다.
“저도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충격 먹었어요. ‘여기까지 간다고?’ 싶었지만 갈 데까지 간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한 나겸의 시점에서는 ‘이제 나는 벼랑끝이야. 이 방법밖에 없어’라고 생각했을 것 같더라고요. 오로지 목적이 정우였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변요한 선배님은 첫 만남부터 정우였어요. 실제로도 몰입한 상태였고 진심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저도 그런 면모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함께 호흡을 맞출 때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느껴졌어요. 변요한 선배님과는 어떤 역할이든 다른 작품에서 제가 성장한 다음에 꼭 다시 연기해보고 싶어요.”
러블리함부터 날카로운 블랙톤까지 이어지는 매력적인 스타일링과 함께 소위 ‘그라데이션 분노’라 할 법한 자연스러운 표정 전환이나 딱 부러지는 빌런 대사 등을 더한 연기는 얄미움을 넘어 경악을 느끼게 하는 서사 전개와 함께 고보결의 연기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열었다.
“변영주 감독님이 이번 작품이 제 출세작이 되길 바란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첫 악역 연기를 하면서 주변에서 ‘고보결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좋았어요. 전 앞으로도 보여드릴 모습이 너무 많은걸요.”
고보결에게 ‘백설공주’는 배우로서의 변환점이 됐다. 열아홉 살에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던 존재감 없는 고등학생 최덕미였지만 서른 살이 된 최나겸은 온 세상이 주목하는 스타 배우다. 시청자들은 고보결의 몰입도 높은 연기와 인형 비주얼에 빠져들었고, ‘고보결이 아닌 최나겸은 상상할 수 없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주근깨도 보일 정도로 화장도 많이 안 하고 교정기도 하면서 발음도 어눌하고 행동과 말투, 눈빛, 태도가 현재의 나겸과 대조적으로 보이도록 노력했어요. 화면으로 보면서는 재미있더라고요. 배우로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그걸 한 화면에 담는다는 게 신났어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여서 화려한 존재로서 변하는 타당성을 줘야 했어요. 톱스타 역을 위해선 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고 식단을 열심히 했어요. 저는 그때의 생활이 촬영, 대본 보는 시간, 운동, 잠자는 시간밖에 없었어요. 그냥 배우도 아닌 ‘톱스타’란 말에 무게감이 있었어요. 누군가를 참고하진 않았고 제 안에서 최대한으로 예뻐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에 CF 장면부터 촬영했는데 몸 실루엣이 다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촬영했어요. 그 드레스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입어야 했는데, 체중도 빠졌고 근력이 많이 생겼어요. 제 인생에서 제일 말랐던 때였던 것 같아요.”
2011년 데뷔 이후 ‘도깨비’의 반장 김윤아, ‘고백부부’에서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이었던 민서영, ‘마더’에서 언니와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기자 강현진, ‘하이바이 마마!’의 시크하면서도 내면은 따스했던 오민정, ‘성스러운 아이돌’의 엘리트 매니저 김달 등 따스하면서 내면이 단단한 인물을 주로 선보인 고보결은 ‘백설공주’의 최나겸을 만난 기존에 구축한 자신의 이미지를 산산이 부수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 내내 고보결은 겸손하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힘들어도 재미있는 게 연기라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것은 그에게 연기자로서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서 연기를 시작했고, 아직도 훌륭한 연기자가 되는 연기에 대한 집착이 있어요. 그동안은 전체적으로 제 삶을 못 봤어요. 제 삶을 잘 돌아보고 싶어졌어요. 나답게 살려고 노력해요. 장르에 대한 욕심도 많고, 더 많은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어요. 저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요. 저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아직도 제 연기를 잘 못 보겠더라고요. 많이 아쉽기도 하고, 그럴수록 현장에 대한 욕구가 커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연기에 집착하고 있어요.”
[사진 제공 = 하이지음스튜디오]
유병철 글로벌에픽 기자 e ybc@globalepic.co.kr/personchos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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