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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㉖] 퇴직연금사업자는 왜 내 ‘노후 월급’을 설계해 주지 않는가?

2026-10-13 08:27:57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이미지 확대보기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㉕편에서는 퇴직급여를 기존 IRP에 모으기보다 다른 금융기관의 새 계좌로 받게 하는 관행을 살펴보았다. 어렵게 계좌를 이어 놓았다고 연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편에서는 계약형 퇴직연금사업자가 가입자의 삶에 맞는 ‘노후 월급’을 설계하고 권유해 실제 연금수령으로 연결할 책임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지난 편에서 퇴직급여 수령용 IRP를 하나 더 만든 오 과장(가상의 인물)은 그 계좌를 해지하지 않기로 했다. 목돈으로 꺼내지 않고 연금으로 받겠다는 생각도 분명했다.

금융기관에 연금수령을 문의하자 매달 받을 금액과 기간을 정할 수 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5년, 10년, 20년처럼 기간을 정하고 적립금을 나누어 받는 방식이었다.

오 과장은 10년을 골랐다. 일시금보다 오래 받을 수 있고, 매달 돈이 들어오니 연금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10년 후 연금이 끊기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오 과장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간을 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퇴직 후 어느 시기에 어떤 소득이 필요하고, 지금 모은 돈으로 그 소득을 얼마나 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노후 생활계획표’였다.

연금은 기간표가 아니라 인생의 시간표다

오 과장의 IRP에 모인 돈이 2억원이라고 해보자. 이 돈을 단순히 10년으로 나누면 한 달에 약 167만원이다. 실제 수령액은 운용수익과 수수료, 세금에 따라 달라지지만 구조는 단순하다. 처음 10년 동안은 월급처럼 돈이 들어오고, 10년 뒤에는 지급이 끝난다.

이를 연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세법은 일정한 요건과 한도 안에서 연금계좌의 돈을 나누어 받으면 ‘연금수령’으로 구분한다. 일시금보다 세금도 유리하다.

그러나 세법상 연금수령과 노후의 월급은 같은 말이 아니다. 월급은 이번 달에만 필요한 돈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식비와 관리비, 의료비는 다음 달에도 필요하다. 내가 정한 수령기간이 끝나면 멈추는 돈만으로는 그 이후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

5년이나 10년 동안 받는 방식이 나쁜 것은 아니다. 60세에 퇴직하고 65세부터 받는 국민연금만으로 이후 생활비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면, 5년짜리 인출은 훌륭한 가교소득이 될 수 있다.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문제는 기간을 정해 받는 방식 자체가 아니다. 어떤 형편인지 묻기 전에 기간부터 고르게 하는 데 있다. 다리를 건너기 위한 돈인지, 평생 끊기면 안 되는 생활비인지 정하지 않은 채 기간만 고르면 목돈을 잘게 나누는 일에 머문다.

연금의 시간표는 사람마다 다르다. 국민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비는 사람이 있고, 국민연금을 받고도 생활비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 집을 고치거나 자녀의 결혼을 도와줘야 할 수도 있고, 고령기에 병원비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같은 2억원이라도 언제,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한 장의 ‘노후 생활계획표’를 보여줘야 한다

오 과장이 금융기관의 화면을 다시 열었다고 생각해보자. 이번에는 첫 화면부터 질문이 달라진다.

몇 살에 퇴직하는가. 국민연금은 몇 살부터 얼마를 받는가. 그전까지 매달 필요한 생활비는 얼마인가. 국민연금이 시작된 뒤에도 얼마가 부족한가. 병원비나 주거비처럼 따로 남겨둘 돈은 얼마인가. 그리고 이 돈이 최소 몇 살까지 이어지기를 원하는가.

오 과장이 답을 넣자 화면에는 하나의 생활계획표가 펼쳐진다. 국민연금을 받기 전에는 IRP에서 가교소득을 받고, 국민연금이 시작된 뒤에는 부족한 생활비만 보탠다. 예상한 의료비는 별도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계속 분산투자한다. 오래 살 때를 대비해 생활비의 일부는 평생 이어지는 보장소득으로 바꾸는 방안도 함께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월 얼마를 받는다는 단순한 숫자 하나가 아니다. 돈이 몇 살에 끝나는지, 시장이 나쁠 때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더 오래 살 때 어느 소득이 남는지까지 같은 화면에서 보여줘야 한다. 생활비를 조금 늘리면 자산이 더 일찍 소진되고, 고령기의 소득을 늘리려면 당장의 돈은 줄여야 한다는 관계도 알 수 있어야 한다.

노후 생활계획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화면에는 오 과장이 선택할 수 있는 연금 메뉴가 함께 나타나야 한다.

첫째 메뉴는 국민연금이 시작되기 전 5년 동안 더 많이 받는 ‘가교소득형’이다. 둘째는 국민연금 개시 뒤 부족한 생활비를 오래 보충하는 ‘평생생활비형’이다. 셋째는 병원비와 주거비를 따로 남겨두고 나머지를 유연하게 받는 ‘유동성확보형’이다.

세 메뉴를 늘어놓고 알아서 고르라고 해서도 안 된다. 오 과장의 퇴직시점과 국민연금 개시 시점, 필요한 생활비를 고려해 어떤 메뉴가 더 적합한지 설명하고 권유해야 한다. 매달 받을 금액과 그 금액이 달라지는 시점, 돈이 예상보다 빨리 줄어들 때의 대응방법도 함께 보여줘야 한다.

오 과장은 권유받은 안을 그대로 선택할 수도 있고, 금액을 바꾸거나 다른 안을 고를 수도 있어야 한다. 선택 버튼을 누르면 얼마를 언제까지 어떤 주기로 받을지, 어떤 자산을 먼저 팔지가 실제 연금수령 조건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제야 5년이나 10년이라는 기간부터 고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삶의 조건을 반영한 연금설계가 된다. 이 설계를 위해 퇴직연금사업자는 새로운 만능상품을 만들 필요가 없다. 국내에는 종신연금보험과 일정 기간 나누어 받는 방식, IRP 자산을 계속 운용하며 정기적으로 인출하는 방법이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흩어진 수단을 한 사람의 노후 시간표 위에 올려놓고 목적에 맞게 조합·비교해 주는 길이 약하다는 데 있다.

“알아서 고르세요”에서 “이 안을 권합니다”로

오 과장이 금융기관에서 처음 받은 질문은 “5년, 10년, 20년 중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였다.

영국에서 자문을 받지 않고 연금을 인출하려는 사람이 받는 첫 질문은 다르다. 앞으로 5년 동안 이 돈을 어떻게 쓸 생각인지부터 묻는다. 당분간 쓰지 않을 것인가, 평생 받는 소득으로 바꿀 것인가, 오랜 기간 조금씩 꺼내 쓸 것인가, 한꺼번에 찾을 것인가. 기간이나 상품 이름이 아니라 돈의 용도를 먼저 묻는 것이다.

올해 4월부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개인별 종합자문을 받지 않는 고객에게도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 이 방법을 권합니다”라는 준비된 제안을 금융회사가 먼저 내놓을 수 있게 했다. 호주도 퇴직연금기금에 가입자의 은퇴소득 전략을 세우도록 하고, 2026년에는 가입자의 필요에 맞게 상품과 지급방식을 조합하라는 모범원칙을 내놓았다.

해외에도 완성된 답은 없다. 다만 상품을 진열한 뒤 알아서 고르라는 방식에서, 가입자가 자신의 은퇴소득을 먼저 보고 행동할 수 있게 돕는 방식으로 옮겨가는 방향은 분명하다.

첫 질문이 다르면 마지막 선택도 달라진다. 연금계산기와 상품목록은 선택할 재료일 뿐이다. 재료를 늘어놓는 일과, 그 재료로 만든 안을 권하는 일은 다르다. 권유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받기 시작한 뒤에도 남은 자산과 예상 지급기간을 정기적으로 보여주고, 계획을 고칠 기회를 줘야 한다.

이것은 사업자가 대신 결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㉕편에서 보았듯이 사람은 가장 쉬운 길을 따라간다. 더 나은 선택을 그 가장 쉬운 길에 놓아두라는 것이다. 권유받은 안을 거절하고 일시금으로 받을 권리는 끝까지 가입자에게 남는다. 최종 결정이 가입자의 몫이라는 이유로 설계와 권유의 책임까지 넘겨서는 안 된다.

계약형의 약점이 여기서는 강점이 된다

기금형은 많은 가입자에게 공통으로 적용할 기본경로를 만들고 위험을 함께 나누는 데 강하다. 계약형은 다르다. 사업자가 가입자와 직접 계약하고, 창구와 상담조직, 앱과 계좌정보를 가지고 있다.

같은 2억원을 가진 두 사람에게도 필요한 소득의 모양은 다르다. 한 사람은 국민연금이 3년 뒤에 시작되고, 다른 사람은 이미 받고 있다. 한 사람은 배우자의 소득이 있고, 다른 사람은 혼자 산다. 가입자의 동의를 받아 이런 사정을 확인하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메뉴를 권할 수 있다.

개별 계약과 판매망은 그동안 계약형의 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그런데 연금을 받는 단계에서는 그것이 개인별 설계의 바탕이 된다. 상품을 팔기 위해 써온 설계와 권유의 역량을
가입자의 노후소득을 만드는 데 쓰면 된다.

물론 사업자가 가입자의 모든 사정을 알 수는 없다. 자기 상품만 유리하게 권할 위험도 있다. 그래서 왜 이 안을 권하는지와 비용을 함께 밝혀야 한다. 직접 제공할 수 없는 해법은 제휴하거나, 적합한 곳으로 옮겨갈 길까지 보여줘야 한다.

현행 IRP에도 지급기간과 지급주기, 지급액을 정하고 금융기관에 따라 나중에 조건을 바꿀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물론 현행법이 앞서 말한 화면과 상담 절차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기능을 가입자가 하나씩 찾아 조립하게 두는 것과, 삶에 맞는 메뉴로 묶어 권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뒤쪽은 사업자가 오늘 시작할 수 있다.

“10년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㉕편에서 우리는 퇴직급여가 기존 노후계좌로 이어지는 길을 물었다. 계좌를 이어 놓은 다음에는 그 안의 돈이 소득으로 이어져야 한다. 통장에 오래 남아 있다고 연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매달 조금씩 나온다고 노후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가입자는 긴 교육자료를 읽고 연금의 필요를 깨닫지 않는다. 자신의 노후 생활계획표에서 소득이 끊기는 빈칸을 보는 순간 깨닫는다. 그 빈칸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메울 수 있는 연금수령안을 설계해 권유하고 실제 지급까지 연결하는 것. 그것이 계약형 퇴직연금사업자가 해야 할 선택설계다.

오 과장이 귀갓길에 혼자 떠올린 질문은 사실 금융기관의 첫 화면에 있어야 했다. “10년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고 가입자가 뒤늦게 묻게 할 것이 아니라, 사업자가 먼저 묻고 함께 답을 설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입자의 곁에서 이 설계를 끝까지 도울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가? 다음 편에서는 그 역할을 ‘연금설계사’, 더 넓게는 ‘선택설계사’라는 이름으로 살펴보고, 국가·회사·퇴직연금사업자의 책임과 함께 선택설계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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